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가 인도 옆에 멈춰섰다. 차창이 열리고 차에 탄 남성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남학생 2명에게 말을 걸었다. 반팔에 반바지, 책가방을 맨 두 학생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멈칫’ 하더니 뒤로 돌아 뛰어 도망갔다.
5일 서울 서대문경찰서가 취재진에게 제한적으로 공개한 폐쇄회로(CC)TV 영상에 담긴 장면이다. 이날 경찰은 최근 논란이 된 미성년자 유괴 미수 사건에 대해 브리핑하고 수사과정을 설명했다.
사건은 지난달 30일에 경찰에 접수된 신고에서부터 시작됐다. 신고 내용은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부근에서 유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사흘 뒤인 지난 2일 “수사결과 약취·유인 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언론에 알렸다. 그런데 이틀 뒤인 지난 4일 돌연 “미성년자 유인 미수 피의자 세 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경찰의 오락가락 발표와 ‘유괴 미수’라는 문구에 시민들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20대 친구 세 명, SUV 타고 초등생에 “태워줄까” 제안
경찰 수사결과 차를 타고 가면서 초등학생들에게 말을 건 이들은 중·고교 동창인 20대 초반 남성 3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들 3명을 지난 3일 긴급체포하고 범행을 주도한 2명에 대해 미성년자 유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미성년자 유인죄는 ‘속이거나 유혹해 미성년자를 꾀어 데리고 가는 행위’를 말한다. 미성년자를 유인하려는 의사가 있었다면 동기나 목적에 상관없이 죄가 성립된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지난달 28일 오후 3시30분쯤 식당에서 짬뽕을 먹고 귀가하다가 길가에서 본 초등학생들에게 창문을 열고 “귀엽다.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이들은 약 4분 사이 2개 초등학교에 다니는 총 4명의 저학년 남학생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말을 건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 말을 건 초등학생은 이 말을 듣고 멈칫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두 번째 학생은 멈춰서지 않고 지나쳐갔다. 세 번째 범행에서 말을 건 두 명의 초등학생은 놀라서 뒤로 도망쳤다.
이들의 범행은 두 번째 피해 학생의 말로 꼬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두 번째 피해 학생이 ‘길 가다 누군가 태워준다고 했다’는 취지의 말을 부모에게 했고, 이후 이 내용은 태권도 학원과 학부모 단체 대화방 등에서 공유됐다. 심상치 않은 일임을 느낀 한 시민은 이 내용을 접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 내용은 ‘흰색 승합차’를 탄 남성들이 차에 태워주겠다고 말을 건넸다는 것이었다. 형사들은 피해 학생과 학부모를 찾아갔다. 현장 CCTV 영상도 확보해 보여줬다. 하지만 문제의 흰색 승합차는 영상에서 볼 수 없었다. ‘다른 차량일 수도 있으니 자세히 봐달라’고 했지만 피해 학생이 구체적인 차량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후 인근 학교에서는 “최근 인근 초등학교 후문과 A시장 공영주차장 놀이터 부근에서 흰색 차량에 탑승한 낯선 남성 두 명이 아이들에게 접근해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 사례가 보고됐다”고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이 일은 지난 2일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경찰은 당시 이 보도에 대해 “피해아동의 이동 경로상의 CCTV를 확인했으나, 약취 유인 행위는 발견할 수 없었다”며 유괴 사건 발생 의혹을 부정했다. 하지만 보도를 본 한 학부모가 같은 날 비슷한 피해가 있었다는 신고를 추가로 했다.
경찰은 CCTV를 다시 확인해 남성들이 탄 차량을 확인했다. 가해 차량은 흰색 승합차가 아닌 쥐색 SUV였다. 이 차량의 행적을 역추적한 결과 앞서 두 차례 학생들에게 접근하는 장면도 파악됐다. 경찰은 이후 남성 3명의 신원을 특정하고 이들을 차례로 체포했다.
“장난이었다” 진술했지만, 경찰 “사안이 중대하다” 구속영장 신청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들은 전날 술을 마셨고 다음날 함께 짬뽕을 먹고 나오다가 장난을 친 것 뿐이라고 진술했다. 이들이 한 피해 학생을 보고 “귀엽게 생겼다. 장난 한번 칠까”라고 말해 즉석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취지다. 실제 차량에 태울 의도는 없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일부 피의자는 전과가 있었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는 “동종 전과는 없었고, 구속영장을 신청할 때 전과도 참고했지만 성범죄 등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뒷좌석에 탄 B씨의 경우 “잘못되면 범죄가 될 수 있다”며 친구들을 제지했다고 한다. B씨에 대해서는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들이 탄 차량과 휴대전화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였고, 현재 포렌식 중이다. 조사 결과 이들이 탄 차량은 A씨 아버지 소유로 차량 내부에 블랙박스가 설치돼 있었지만, 영상 저장을 위한 메모리칩은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3명 모두 범행 당시 마약류을 투약하거나 음주를 한 정황은 없었다.
경찰은 이들이 추가 범행을 하려 했거나 사전에 구체적인 범행을 계획했는 지 등을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사회적 불안감 등을 중대하게 판단해 영장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거나, 증거 인멸, 도망할 우려가 있는 등 법에 따른 구속 사유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안이 중대할 뿐 아니라 세 차례 연속으로 범행을 시도했다”는 것을 구속이 필요한 사유로 주장했다.
경찰은 세 차례 연속된 범행이 아주 짧은 시간 즉흥적으로 이뤄진 데 대해선 “범행이 약 4분 사이에 이뤄졌지만, 장난으로 보기에는 사안이 중대하고 언론 등에서 이슈가 된 상황에서 경찰이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애초에 수사가 부실하게 이뤄진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아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첫 신고가 이뤄진 두 번째 사건은 피의자들이 탄 차가 접근한 시간이 워낙 순간적이라 영상만으로는 피해를 확인하기 어려웠고 피해 학생도 구체적인 차량을 기억하지 못해 범행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세 번의 유인 미수 사건은 모두 사건 당일 신고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경찰 설명에 따르면 총 세 번의 유인 미수 시도가 있었는데, 이 중 신고가 이뤄진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뿐이다. 이 사건도 이틀·엿새 뒤에 신고됐다. 어린 자녀의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범죄가 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거나, 학생들이 문제점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자녀들이 이런 일을 겪으면 빠르게 신고해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10시 쯤 서울서부지법 김형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미성년자 유인미수 혐의를 받는 두 명에 대해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김 부장판사는 “피의자들의 혐의 사실과 고의 등에 다툼의 여지가 있어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성이 있고, 피의자의 주거가 일정하고 대부분의 증거가 수집돼 있어 증거인멸이나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