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동양 사회에서는 지식인이 자신의 올곧은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지조와 절개를 칭송하였지만, 현실에서는 부와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변절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학자인 전겸익(1582~1664년)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전겸익은 명나라 만력 황제(1572~1620년) 무렵에 과거 시험인 진사에 급제하여 국가 역사서를 편찬하는 벼슬인 한림원편수에 임명되었고, 만력 황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인 신종실록의 편찬에 참가할 만큼 학문을 인정받은 학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천계 황제(1620~1627년) 무렵에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린 환관 위충현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꾸며낸 동림당 사건에 전겸익이 휘말렸고, 이로 인해 전겸익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실업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가 되었어도 전겸익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사회적인 대우도 좋은 편이어서 그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638년, 전겸익은 젊고 아름다운 기생인 유여시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첩으로 맞아 들였습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이자성의 반란군이 들이닥치자 숭정 황제(1627~1644년)는 목을 매어 자살했고, 곧바로 청나라 군대가 북경에 쳐들어와 반란군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는 시시각각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면서 각 지역을 점령하는 등 중국은 전쟁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유여시는 전겸익에게 “강남의 남경으로 가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 정권에 참가해서, 청나라에 맞서 싸웁시다.”라고 호소했고, 그 말에 전겸익도 동의해서 남경의 남명 조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전겸익은 남명의 홍광 황제(1644~1645년)로부터 지금의 교육부 장관에 해당하는 예부상서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홍광제는 술과 여색만 밝히는 무능한 군주였고, 남명 정권은 서로 권력을 잡으려 다투는 군벌들의 불안정한 연합체에 불과하여 매우 허약하였습니다.
그리고 1645년 5월, 청나라 군대가 양자강을 건너 와 남경에 쳐들어오자 남명의 군대는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여시는 전겸익에게 “이제 모든 일이 다 틀렸으니, 우리만이라도 깨끗하게 자결을 합시다.”라고 그를 호수로 데려가서 함께 빠져 죽자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호수의 물을 만져 본 전겸익은 “오늘 물이 너무 차갑소!”라고 말한 뒤에 물러났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유여시는 너무나 기가 막혀 자신만이라도 자살하려 호수에 뛰어들었으나, 이번에는 전겸익이 구해내어 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겸익은 스스로 청나라 군대를 찾아가 항복했으며, 남명의 관리와 병사들을 상대로 “명나라는 이미 끝났다. 그러니 다들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 두고, 어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라!”라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직접 써서 널리 퍼뜨렸습니다.
엄격한 유학자였던 전겸익은 왜 청나라에 항복했을까요? 아마 그가 한 “물이 차갑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애국심보다는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했던 듯합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항복하더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임명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전겸익은 1646년, 청나라로부터 교육부차관에 해당되는 벼슬인 예부우시랑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전겸익의 행동은 유여시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겁하게 오랑캐한테 항복하여 지조를 더럽혔다!”는 분노를 샀습니다. 그리고 1664년 전겸익은 청나라의 벼슬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다가 곧 숨을 거두었습니다. 변절을 했어도 결과는 초라했던 것입니다.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15~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