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출처 https://cafe.daum.net/historywar/Nwo/3965
최근 들어 송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갑작스럽게 180도 바뀌었습니다. 한때 군사력이 약했다고 여겨졌던 송나라가 이제는 무적의 강력한 왕조로 둔갑했습니다.
이와 함께 여러 가지 황당한 주장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열렬한 송나라 지지자들은 송나라의 해외 원정 승률이 70%를 넘어 한나라와 당나라를 훨씬 능가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송나라의 적대국들은 요, 금, 서하, 몽골처럼 중앙집권 체제가 잘 갖춰진 국가들이었고, 한나라와 당나라가 싸웠던 흉노나 돌궐 같은 유목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들은 송나라가 중국 5천년 냉병기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한족 왕조였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음, 참으로 매혹적인 동화 같군요. 아름답고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송나라 이전, 오대 군벌 시대에는 수많은 군벌들이 고작 한두 개의 성만을 다스리고 있었는데도, 훗날 송나라 군대를 그토록 괴롭혔던 강력한 적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니 말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오대 시대를 중원 지역 한족의 암흑기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서하의 탕구트족에게도 암흑기였습니다. 당시 서하를 건립한 탕구트족은 중원 군벌들에게 하찮은 상대로 여겨졌습니다.
910년, 산서성 태수 이무정은 충동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탕구트족의 본거지인 하주를 한 달 동안 포위 공격했습니다. 탕구트족은 결국 하남성의 군벌인 주전충(훗날 후량의 태조)의 도움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이무정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는 다른 군벌들인 주전충이나 이극용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던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무정은 탕구트족을 놀랍도록 쉽게 제압했습니다.
송나라가 건국되면서 이에 복종하지 않은 탕구트족은 세대에 걸쳐 저항하며 마침내 이원호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나라인 서하를 건국했습니다. 이후 200년 동안 탕구트족은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송나라와 맞서 싸우며 번번이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송나라의 가장 강력한 적수는 북쪽의 요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북송에 큰 위협이 되었던 요나라는 그보다 이전인 오대 시대에는 오히려 중원 각 지방의 군벌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오히려 중원의 군벌들이 모두 통합된 송나라 시대에는 요나라가 송나라를 상대로 우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요나라 최초의 진정한 실력자는 단연 요나라를 세운 야율아보기였습니다. 그가 북쪽에 강력한 요나라를 건설하는 동안, 중원은 끊임없는 내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산서성과 하북성을 지배하던 후당 왕조와 하남성과 산동성을 지배하던 후량 왕조는 장기간의 전쟁을 벌여 경제적 파탄과 만연한 빈곤, 그리고 급격한 인구 감소를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는 거란에게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고, 현명하고 강력한 아율아보기는 신이 내린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917년, 후당군은 황하 유역에서 후량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쪽 국경 지역의 후당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동맹국인 요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후당 군대의 지휘관인 이존욱은 야율아보기와 싸울 병력이 극히 부족했습니다. 겨우 2만 명의 병력을 모았는데, 그중 기병은 3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야율아보기는 무려 30만 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당군은 산길을 따라 진격하여 요나라 기병대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이에 요나라 기병대는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21년, 후당은 황하에서 후량과 다시 충돌했고, 동시에 북쪽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요나라의 기병대는 이 기회를 틈타 다시 남쪽으로 진군했습니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존욱이 훗날의 송나라처럼 요나라에 매년 공물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존욱은 이를 묵살하고 직접 수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거란족과 싸우러 갔습니다.
양측은 무방비 상태의 하북 평원에서 충돌했습니다. 이존욱은 직접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1만 명이 넘는 거란 기병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야율아보기의 막내아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어진 왕성 전투에서 이존욱은 다시 1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거란군을 향해 맹렬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무리한 돌격으로 이존욱은 적진에 갇혀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그의 장군이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그를 구출했습니다. 위험에서 벗어난 이존욱은 아찔한 순간을 잊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한번 거란군을 공격했습니다. 이 세 차례의 연이은 공격으로 거란군은 완전히 패퇴하여 북쪽으로 흩어졌습니다.
초원으로 돌아온 야율아보기는 남은 생애 동안 다시는 남쪽으로 감히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송나라 군대가 요나라를 상대로 70%의 승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간단한 분석으로 충분합니다.
오대시대에서 가장 악명 높은 무능한 군주는 후진의 황제 석중귀였습니다. 그는 생전에 거란족과 세 차례의 주요 전투를 벌여 두 번 승리했습니다. 심지어 요나라의 황제이자 야율아보기의 아들인 야율덕광으로 하여금 낙타를 타고 도망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후진 왕조는 결국 배신으로 거란족에게 멸망했지만, 두 번의 승리와 한 번의 패배라는 기록은 거의 70%에 달하는 승률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송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송태종 조광의는 중원을 통일한 후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습니다. 고량하 전투에서 요나라 군대는 송 태종의 엉덩이에 화살을 쏴 그를 당나귀 수레를 타고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송나라 군대가 70%의 승률을 달성했을지라도,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바를 이루지 못해 결국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반면 한나라와 당나라는 70%의 승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승률이 허상에 불과하며, 그저 무의미한 숫자일 뿐임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