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 왕 계보 미스테리, 해씨 고구려설 이야기.

유머/이슈

고구려 초기 왕 계보 미스테리, 해씨 고구려설 이야기.

최고관리자 0 2 10:25

시조이신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중략...고명을 이어 받은 세자 유류왕이 나라를 도로써 잘 다스르셨고 대 주류왕이 왕업을 계승하였다.

17세 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의 왕위에 올랐으니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광개토대왕 비 

 

 

d8c874d6fd3b85044a82974f27b4afef_1783560298_5693.jpg

 

삼국사기가 얼마나 정확한 사서인가 하면 

동시대 제작 된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온 즉위 연도와 

삼국 사기의 즉위 연도가 1년 밖에 차이가 안 납니다. 

이웃나라 일본 서기의 오차는 120년입니다. 

1년은 즉위 년을 산입하는가 여부의 차이라서 

사실상 오차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삼국사기는 나름 굉장히 정확한 역사서죠  

 

근데 문제는 이 삼국사기에 기록 된 

고구려 왕들의 기록이 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중간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왕 

"태조왕"의 존재가 그러합니다. 

 

8f7eb86c7b3df24a2095901bdde4121c_1783560299_1801.jpg

 

일단 태조(太祖)왕 이란 뜻 자체가 

일반적으로 왕조의 창업자를 의미합니다  

 

다음 왕위를 이었다는 차대(次大)왕, 두번 째 왕  

그 다음 왕위를 이었다는 신대(新大)왕, 새로운 왕  

특이하게도 태조왕 이후 즉위 한 3대가 

모두 새로운 왕조 창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함께 보면 더욱 이상해집니다.  

 

2대 유리왕 : 동명왕의 아들이다 ... 성은 해씨다 

3대 대무신왕 : 성은 해씨다, 유리왕의 3남이다 

4대 민중왕 : 이름은 색주고 성은 해씨다 대무신왕의 아들이다 

(*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의 동생이라 합니다. )

5대 모본왕 : 이름은 해우고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

 

동명성왕이 주몽이 성씨를 "고(高)" 씨로 정했다 기록 하는데 

뜬금 없이 다음 왕위를 이어간 유리왕에서 부터 모본왕까지

왕의 성씨를 모두 "해(解)" 씨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 주몽의 정확한 명칭은 광개토대왕비에서 확인되는 바 

실제로는 "추모왕"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로 주몽이 더 잘 알려졌고

본문에서는 이해하기 쉬운 주몽으로 표기합니다.)

 

f1149cb75a21be7369b79cb5e7c49496_1783560299_6225.jpg

 

유리왕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고씨 성을 칭한 주몽이 

과거 부여에 두고 왔다는 아들? 유리가 찾아 왔고

칼을 맞춰서 아들이 맞다 확인 했다 합니다. 

그리고 유리가 오자 기존에 주몽과 살던 

소서노 왕후와 왕자 비류, 온조는 모두 

유리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 갔죠

 

이에 대한 기록은 더 의미심장합니다.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함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세였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했다고 한다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 

 

동명왕편의 위 내용은 구삼국사의 기록입니다. 

삼국사기 기록의 원래 출처가 되는 사서로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동명왕편을 통해서

그 내용이 설화적 내용이었다 추정합니다.

 

그 동명왕편에 보면 유리왕의 등극이 뭔가 꺼림직합니다 

부러진 칼 을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졌다....????

심지어 사건이 벌어지고 고작 4개월 뒤에 주몽이 급사합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했다"

즉 동명왕 주몽의 시신이 없어 옥으로 대신 매장했다 ????

 

그리고 왕비인 소서노를 비롯한 많은 무리들이

마치 도망치듯 남쪽으로 내려 갔습니다 

 

a676801256f10226077d0d82b8d14914_1783560300_1152.jpg

 

마지막 해씨 왕으로 기록이 된 모본왕의 경우 

그가 폭군이었다는 기록과 함께 시해를 당했다 합니다. 

모본왕의 아들 태자도 불초 하다며 폐위하고 

신하들이 새로운 왕을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처음 언급한 "태조왕" 입니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으로 부터 시작한

고구려 해씨 왕들 중에 마지막 왕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폭군이었다고 나오지만 

정말? 폭군이 맞는지 논란이 있는 왕이기도 합니다. 

 

《후한서》 〈광무제본기〉: 요동 변방의 맥인이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침략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구려(句麗)와 선비가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침략하다가 제융이 은신(恩信)으로 부르니 다시 항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 재위 2년, 장수를 보내 후한(後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했다. 이에 후한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했다.

 

모본왕은 제위 기간 한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했는데 

지금의 산서성 깊숙한 태원까지 공격했을 정도입니다 

(삼국지 게임하면 나오는 진양입니다) 

또한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구휼했다는 기록도 나오죠 

 

근데 신하들을 학대하고 마구 죽이는 폭군이었음으로 

두로라는 신하가 모본왕을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구려에서 왕을 죽이는 정변이 있었고  

그 결과 새로 왕으로 즉위한 것이

 

고씨 "태조왕" 입니다. 

 

8eefa2c1b2f2082360cd363c0b97576d_1783560300_6732.jpg

 

"태조" 라는 용어는 

보통 천자국에서 태묘, 종묘를 만들고  

묘호를 올리며 개국 시조에게 붙이는 명칭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 "태조대왕" 이라 자칭했다는데

고구려가 태묘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태묘에 올라간 묘호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시호로 자칭한 이름 일 수도 있지만 

 

이런 기록이 또 함께 전해집니다 

"태조대왕 또는 국조(國祖)왕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각주"

 

즉 국가의 시조라고 불렀다 합니다 

 

굉장히 이상한 기록이죠

더 말이 안되는 것은 태조왕의 나이입니다.

 

기록만 놓고 본다면 6살에 왕위에 올라 93년 간 왕위에 있었고

그 후 19년을 더 살아 무려 118세에 죽었다 합니다. 

사실상 인간 수명의 기네스 기록을 깬 것입니다.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을 모두 형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록이 맞다면 차대왕은 75세에 왕위에 오르고 

신대왕은 76세에 왕위에 오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고구려가 무슨 신선들이 사는 장수 국가도 아니고  

70대 노인들이 연달아 즉위 했다는 내용도 이상한데 

형제 간의 나이 차는 또 40살 이상 벌어집니다 

 

즉위 하게 된 명분도 이상합니다. 

 

대무신왕의 아들인 고재사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고재사가 나이가 많아 10살에 대신 즉위했다고 합니다. 

부자 상속과 함께 형제 상속을 했던 고구려였으니 

고재사까지는 그래 이해 한다고 해도

???? 조카 상속은 뜬금 없는 내용이죠 

 

특히 삼국 사기 기록이 대부분 정확함에도

이 시기의 기록은 굉장히 부정확하고 중복이 많아집니다 

동시대 중국 측 기록과도 오차가 있습니다.

 

즉위 이후 전개도 의미심장해 집니다 

 

태조왕은 모본왕을 시해하고 옹립 되었고

다시 차대왕에게 살아 생전 왕위를 빼앗기며 

태조왕의 아들이 모두 죽었는데 

그 차대왕은 다시 명림답부에게 시해되어 

신대왕이 즉위 하였다 나옵니다 

 

삼국 유사에 또 의미심장한 이상한 기록이 나오죠 

"국조왕, 차대왕은 모두 신대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의 관계를 추정하는 수많은 가설들과 추정있지만

무엇이 정확한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시기 고구려에서는 극심한 왕권 쟁탈전이 벌어졌고

그로 인하여 혼란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bcea98a16081f4263e49a7a45604e4e_1783560301_1596.jpg

 

고구려에는 국가를 운영하는 중요 부족 5부가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계루부에서 국왕이 나왔고 

절노부에서 왕비가 배출되었으며 

순노부에서는 재상인 대막리지를 맡았다 합니다 

 

왕실인 : 계루부 = 중부 

왕비를 배출하는 : 연나부(또는 절노부) = 북부 

재상 막리지를 배출하는 : 순노부 = 동부 

과거 졸본 세력 : 소노부 (또는 비류부) 서부

후비를 배출하는 : 관노부(환나부) = 남부  

* 위 내역은 추정되는 이론, 설입니다. 

 

그리고 

 

중국 사서인 위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본래 왕이 소노부에서 배출되었는데 나중에 계루부에서 계승했다."

 

????

 

동시대 중국 사서에 고구려 왕계가 바뀌었다고 

아예 기록으로 남기고 있네요. 

 

때문에 이런 이상한 기록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2대 유리왕에서 부터 5대 모본왕까지 

초기 고구려 군주의 성씨는 원래 해씨였는데 

후대에 중간에 고씨로 왕 계보가 교체되었다는

해씨 고구려설의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모종의 이유로 시조 고주몽 이후에 

유리왕을 시작으로 해씨 성을 가진 왕들이 즉위하였고 

해씨성을 가진 왕은 모본왕을 끝으로 쫒겨났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극심한 내전 끝에 

고구려의 왕위는 해씨 -> 고씨로 교체되었으며  

그렇게 창업 군주를 의미하는 태조왕이 즉위했고

고씨 성을 가진 고구려의 왕이 계속 이어졌다 

 

해씨 고구려 설입니다. 

 

5a5726a330e9908fe3aa94fde2caae2b_1783560301_7221.jpg

 

다시 돌아 본문 처음의 광개토대왕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사서는 모두 후대의 기록이라 

불명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비는 당대에 고구려인이

직접 돌에 적어서 쓴 내용이죠 

 

근데 광개토대왕비에 따르면 

고구려 왕 계보는 단 한번도 변한 바가 없습니다. 

 

??????

 

고구려의 시조는 고씨인 추모왕으로 시작해

그로 부터 17대를 내려와 즉위 한 것이 

광개토대왕이라고 너무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죠 

심지어 연도, 왕 계보 세대도 사서 기록과 일치합니다.

 

!! 

 

너무도 이상한게 많고 너무도 특이한 점이 많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구려의 왕통은 불변이며 

모든 왕이 자신들의 조상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동안 고씨와 해씨라는 두가지 왕의 성씨를 두고 

다양한 추론과 가설을 세웠습니다만 

이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고구려왕의 성씨가 처음 부터 있었을까? "

 

고구려 왕의 성씨를 고씨 또는 해씨라고 기록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은 모두 고려시대 사서입니다 

동시대 중국 측 사서인 위지, 한서의 기록에는 

고구려 왕의 성씨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고구려 왕의 성씨가 처음 확인 되는 것은 

장수왕의 성씨가 고씨였다는 기록이며 

광개토대왕비를 통해 주몽과 유리왕이 부자관계

유리왕의 아들 대무신왕으로 부터 계속 이어져 

광개토대왕에 이르렀다라고 나옵니다. 

 

즉 고구려 왕의 성씨라는 "고"씨 조차도  

그 실체가 광개토대왕~장수왕 시절에 이르러서야 

사서와 금석문으로 교차검증이 가능해집니다.

 

초기 고구려가 부 단위로 씨족을 표현했는지 

성씨를 사용해 표현했는지 여부도 알 수가 없는데 

하물며 해씨에서 고씨로 성씨가 바뀌었다는 가설은

아예 입증이 안되는 추론의 영역일 뿐입니다 

 

고구려가 중요 분기점 마다 

새로 역사서를 편찬 했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조 정통성에 대한 정리를 중간에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 가설과 추론일 뿐 

정확한 증거는 현재 없습니다. 

 

때문에 역사 학계 통설은 

해씨 고구려 설을 부정합니다. 

 

끝. 

 

 

Comments

Category
반응형 구글광고 등
State
  • 현재 접속자 244(5) 명
  • 오늘 방문자 1,703 명
  • 어제 방문자 2,023 명
  • 최대 방문자 13,504 명
  • 전체 방문자 859,866 명
  • 전체 게시물 0 개
  • 전체 댓글수 0 개
  • 전체 회원수 1,565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