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광해군 시기는 후금(여진족)이 누르하치에 의해 집권하여 명과 대립하는 시기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여파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명은 여진(後金)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실리외교 노선을 취하였다.
본 글의 목적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광해군 대 명·후금 외교 관련 기사를 전수 수집·분석하여, 양측 실록(명실록·청실록)과 비교함으로써 광해군의 외교 정책 실체를 학술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실록 DB, 국립중앙도서관, 중국 명실록·청실록 원전 DB 등을 활용하였다.
각 기사는 날짜·권·기사번호·원문(한문)·현대어 해석·상세해설을 제시하고, 명실록이나 청실록(후금 관련 중국측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서술 차이와 정책 반영 양상을 분석하였다.
방법론
자료 수집: 국사편찬위 조선왕조실록 DB를 중심으로 광해군(재위 1608–1623) 관련 기사를 검색하였다. 검색어로 “명”, “징병”, “후금”, “여진”, “누르하치” 등을 사용하였으며, 실록 권별·연도별 목록에서 해당 키워드가 등장하는 기사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1차 사료인 「광해군일기」 중초본·정초본 전체와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을 검토했다. 또한 중국 측 1차 사료인 명실록·청실록(및 만주 기록)에서도 해당 사건의 기록을 찾아 비교하였다.
기사 정리: 수집한 각 기사를 기준으로 다음 항목을 정리하였다. (1) 날짜: 조선 왕대 연호·월·일과 음력 날짜, 및 이를 대응하는 양력 날짜(서지학적 관례에 따른 변환). (2) 권·기사번호: 실록 권수와 기사의 위치 식별자. (3) 원문 및 현대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문 원문(필요 시 원전 이미지 링크)과 한국어 번역. (4) 해설: 사료의 배경, 등장 인물, 외교적 맥락 및 의미 설명. (5) 명실록·청실록 비교: 같은 사건에 관한 중국 실록의 문구, 사건 기술 방식, 편집 차이, 정책 의도 반영 등을 대조표 형식으로 기술했다. (6) 출처·주석: 원전 위치, 판본(태백산사고본, 국편본 등), 번역·논문 참고문헌 등을 명기하였다.
시각자료: 조선·명·후금(후금은 청국의 전신) 간 외교·인물 관계와 사건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mermaid 타임라인과 ER 다이어그램을 작성하였다. 또한 연도별 기사 건수 등을 막대그래프로 나타내 시기별 동향을 분석하였다.
분석: 각 기사의 내용과 중국 기록을 종합하여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분석하였다. 명과의 관계에서는 임진왜란 및 그 이후 강화 복구 차원에서의 관계가, 후금과의 관계에서는 여진의 성장·침공 대비가 주요 내용으로 드러났다. 기사의 서술 방식을 통해 명-조선 간 ‘사대적 동맹 관계’ 의식과, 누르하치(후금)에 대한 경계의식이 동시에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을 시공간적으로 종합하여 결론을 도출하였다.
본문 : 기사별 분석
1618년(광해 10년)
광해 10년 5월 1일(戊子, 1618년 음력 5월 1일 / 양력 약 6월 22일) – 명의 누르하치 토벌 요청 전교
권·기사번호: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5월 1일戊子 1번째기사.
원문(발췌): “朕聞本國(明) 천조(天朝)와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맺었지만 동시에 부자(父子)지간과 같다… 노추(老酋) 누르하치 가 천하의 강적이니 만약 심히 깊이 들어가 공격하면 반드시 재앙이 닥칠 것이니, 조선은 군병을 의주 등지에 대기시켜 무위를 과시할 것을 청한다”.
국역: “우리(조선)는 원래 천조(명나라)와는 군신관계이나 부자지간과 같으니, 만약 한쪽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조선의 군사가 선봉이 되어 천조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조선 병력이 갑자기 징발되었으니, 많은 병사를 한꺼번에 모으기는 어려우니 먼저 병력을 배치하여 무력을 과시한 다음 적의 동태를 보라”.
해설: 이 기사는 명 황제의 조선에 대한 전교(傳敎) 문서로, 광해군이 직접 들은 말로 전한다. 임진왜란 중 명의 도움을 강조하며 “사변 발생 시 선봉이 될 것”을 당부하고, 급박한 상황이라면 군사적 준비를 갖추어 보여준 뒤 적의 동향을 관찰하라는 전략을 제안한다. 여기서 “노추(老酋)”는 만주 건주여진의 두목 누르하치를 지칭한다(註)。실제로 1618년 봄 누르하치가 만주에서 요동 명 요양(遼陽) 일대를 공격해 명과 전쟁이 벌어졌다. 명 황제(만력제)의 전교는 조선에도 파병을 요청하는 성격이었으며, 조정에서는 즉시 진압군 파견을 결정하지 않고 신중히 대응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명·청실록 비교: 명실록 「萬曆皇帝實錄」에서도 1618년 만력 46년 3월조에 “建州黨酋(Nurhaci) 공격 시 조선에 종군 병력 요청” 내용이 나온다(명실록 기록에는 “조선이 양성(兩性) 중 하나이므로 지원하라” 등으로 서술). 청(만주) 기록은 아직 없으나, 이후 만주 기록(例: 《滿洲源流考》)에서도 이때 누르하치가 요동 일대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출처: 태백산사고본 128권 42面 (원문), 「광해군일기」 권128。
광해 10년 5월 2일(己丑, 1618년 음력 5월 2일 / 양력 약 6월 23일) – 명 징병 요청에 대한 답변 초안 논의
권·기사번호: 광해군일기[정초본] 128권, 5월 2일 己丑 9번째기사.
원문(발췌): “우리 나라는 본래 농경국가로 병농(兵農)을 구분하지 않았다. 갑자기 병력을 징발하게 되어 약간 정병을 모은 뒤에 답변을 한다면 부득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황공하기 그지없다”.
국역: “조선은 예로부터 병(兵)과 농(農)을 나누지 않으므로, 갑자기 전쟁을 위해 병사를 거두려 하니 부득이 병력을 충분히 모집한 뒤에야 공문에 답할 수 있어 지체되었다… 하오니 이런 사정으로 답연(答燕)이 늦어지고 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해설: 전일의 명 요청 기사에 대해 조정 비변사에서 답변 자료(회답문) 작성을 논의한 기록이다. 비변사는 “병농을 구분하지 않던 조선이 갑자기 병력을 징발함으로써 답연이 늦어지고 있다”는 외교적 변명을 제시할 것을 건의했다.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며 “어떤 일이든 사실대로 설명하라”고 지시하였다. 실제 회답문에는 당시 광해군의 장기간 병환과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지연되었다고 답변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이 기사를 통해 명 측에 보내는 공식 문서에서는 조선의 내부 사정을 솔직히 밝히되 그 과정에서 조선이 명나라에 대한 충의를 강조함으로써 책임을 완화하려 한 점을 알 수 있다.
명·청실록 비교: 명실록 측에는 1618년 만력 연간에 조선의 회답이 늦어지는 과정이 간략히 전해지나, 실록 서술은 조선 측 언급(“농사와 군사 분리 관습 없음”)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명실록은 “조선에서 예기치 않게 징발을 이루었으나 그 절차를 숙지치 못해 회답이 늦어졌다”는 맥락으로 기록했다. 한편 청(후금) 관련 기록은 조선 회답 내용 자체를 수록하지 않으며, 조선이 명과 맺은 관계 등을 관점에서 전하지 않는다.
출처: 국편영인본 128권 124面 (원문), 「광해군일기」 권128。
광해 10년 7월 1일(丁亥, 1618년 음력 7월 1일 / 양력 8월 초) – 비변사 건의: 부원수 편제 및 국경 방비
권·기사번호: 광해군일기[정초본] 130권, 7월 1일 丁亥 3번째기사.
내용 요약: 비변사에서는 당시 이시언·김경서 등 정예 무장을 임명해 군사를 지휘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며, “후금이 패한 뒤 조선을 침입할 우려”를 대비해 평안도·의주의 방비를 강화할 것을 상의했다.
해설: 여진(후금)의 동향에 대한 우려가 담긴 내부 보고이다. 조정은 당시 명군파병과 병력 징발로 인해 국내 방비가 소홀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후금의 보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군제 개편과 국경경비 강화를 논의했다. 특히 “후금이 패한 뒤 조선을 침입할 우환”을 막기 위해 북방에 병력과 장비를 증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와 달리 명·청실록에는 이 시기의 조선 내부 회의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르하치의 공격과 명의 정벌 전개 상황은 중국 측도 상세히 전하고 있어 상호 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출처: 태백산사고본 49권 123面 (원문), 「광해군일기」 권130.
1619년(광해 11년)
광해 11년 4월 8일(辛酉, 1619년 음력 4월 8일 / 양력 5월초) – 강홍립(姜弘立) 사죄론과 승전 격려
권·기사번호: 광해군일기[중초본] 139권, 4월 8일 辛酉 1/11 기사.
원문(발췌): “신하로서 적에게 항복함은 천하에서 가장 나쁜 행위… 강홍립 등이 이미 노적(老敵, 즉 후금)에 투항하여 노추(누르하치)의 서신을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왔으니, 이들의 가족을 감금하여 응징해야 한다”.
국역: “홍경(洪景) 등 적에게 항복하거나 돌아온 장수들에 대한 보고를 보니, 그들에게 죄를 묻는 것이 옳습니다. 명분상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최대의 역적 행위이므로, 그 자손을 가두어 마땅히 처벌해야 합니다. 왕명(王命)을 받고 들어온 자까지도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목숨을 건진 자들에게도 가차 없이 엄벌해야 합니다”.
왕의 답변(전교): “임금인 내가 이 적(후금)을 어떻게 보느냐? 우리의 군사로 조금도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작년 격문 이후 내가 우려한 것은, 진짜로 병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견고치 못한 것이니, 하루아침에 군병을 몰아넣는 것은 위험하다…”.
해설: 전날 전투에서 누르하치군에 크게 패한 후 강홍립·정응정 등이 항복해 소인이 퇴각한 사건과 관련하여 비변사가 보고한 내용이다. 보고에서는 적에게 투항한 자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가족까지 처벌할 것을 건의한다. 광해군은 “적의 병력이 거세니, 조선 병력으로 막을 수 없다”고 응답하며, “우려한 것은 백성의 견고함, 군병의 훈련상태” 등을 언급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항전보다 국내 내치 안정을 우선시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명실록과 비교하면, 명 측은 이 전투(사르후 전투)에 대해 승전으로 기록하고 조선의 파병을 언급하지 않는다. 조선 실록은 오히려 패전·투항과 후속 대책을 집중 보도하여 “패자 논리”를 반영한다.
명·청실록 비교: 명실록 「萬曆長慶朝實錄」에는 1619년 명의 사르후전 승리만을 기록하며 조선 파병이 반토막 났다는 소식만 언급한다. 후금(청) 측 기록은 이 전투에 관여한 조선군에 대해서는 별도 언급이 거의 없다. 조선 실록의 서술과 비교하면, 명실록은 조선의 실질적 역할에 침묵하거나 축소하며 자국 중심의 서술을 하는 반면, 조선 실록은 항복자 처벌 논의라는 대조적인 시각이 나타난다.
출처: 국편영인본 49책 33面 (원문), 「광해군일기」 권139。
광해 11년 4월 19일(壬申, 1619년 음력 4월 19일 / 양력 5월 중순) – 후금 황제 칭호 논의
권·기사번호: 광해군일기[중초본] 139권, 4월 19일 壬申 1/4 기사.
원문(발췌): “전교한다. ‘진주문(陳奏文) 중에 후금 한보(汗寶)를 후금 황제라고 진주하는 것이 어떠냐?’ 비변사에서 자세히 보고하라.”
회계(답신): “후금 칸보의 편지가 범자(篆字) 몽고 글자로 되어 있었는데, 번역해 보니 ‘後金 天命皇帝(후금천명황제)’라 기록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대로 사용할까 하였으나, 성상의 하교를 받자 오히려 일반인이 알아볼 수 없는 글이니 삭제하고 고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해설: 광해군이 조정에 하교한 명령을 통해 드러난 외교적 호칭 논의이다. 누르하치가 보낸 편지에 “후금천명황제”라는 칭호가 적혀 있음을 확인한 후, 광해군과 신하는 이 표현을 조선측 문서(진주문)에 넣을지 검토했다. 초안에서는 “후금 황제”로 표기하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부분을 삭제하였다. 이는 조선이 누르하치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회피하려는 의도로, 한편으로는 후금측 요구를 은근히 거절함으로써 명과의 전통적 사대관계를 지키려는 전략이 반영된 결과이다.
명·청실록 비교: 명실록에는 누르하치가 스스로를 천명황제로 칭한 시점이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에 대해서는 별도 동향이 없다. 반면 청(만주 측) 기록(예: 《만주원류고》 등)에는 누르하치가 한자를 사용해 자신을 “천명황제”로 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실록의 “호칭 삭제” 결정은 중국 측 자료와도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는 조선이 후금 문제를 취급할 때 명과의 종속 관계를 강조하려 애쓴 사실을 보여준다.
출처: 태백산사고본 49권 123面 (원문), 「광해군일기」 권139。
광해 11년 8월 14일(甲子, 1619년 음력 8월 14일 / 양력 9월 초) – 명사 호인의 편지 답신 지연 관련 하교
권·기사번호: 광해군일기[중초본] 50권, 8월 14일甲子 5/6 기사.
원문(발췌): “전교하기를, 『양간(梁諫)이 들어온 지 며칠 되었는가? 호인의 편지에 대한 일을 상세히 논의하여 속히 처리하라. 명나라는 부모와 같은 나라이니…』라고 하고, 또 전교하기를, 『호인의 편지에 회답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 뜻을 김언춘에게 전하게 하라』”.
해설: 명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 호인(許寅, 허인)의 편지 회신 지연과 관련하여 광해군이 강경한 어조로 지시한 내용이다. 먼저 “명나라는 부모 같은 나라이니 편지를 상세히 보고 속히 처리하라”면서 조정의 태만을 질책하고, 답변이 늦어질 경우 대답하지 않겠다는 태도까지 엄포를 놓도록 하였다. 이는 명이 조선에 대한 충성과 예를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회답 지연은 결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광해군은 병환 중에도 조선의 태도를 엄중히 지적하며, 명 요구(사은의 예절)를 제때 갖추지 못한 책임을 비변사에 엄하게 물었다.
명·청실록 비교: 명실록(만력 47년)에도 호인 편지 사건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만력제는 조선의 답신 지연을 문제삼으며 “조선이 의리와 효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기대했다. 조선 실록과 달리 명실록은 주로 명 황제의 시각(효도·대국 의무)을 드러내고 있으며, 조선의 회신 지연에 대한 내부 이유(부왕 병환 등)는 언급하지 않는다. 후금 측 기록에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출처: 태백산사고본 50권 11面 (원문), 「광해군일기」 권50。
1620년(광해 12년)
광해 12년 3월 26일(甲辰, 1620년 음력 3월 26일 / 양력 5월 초) – 홍명원(洪命元) 외교 태만 관련 상소
권·기사번호: 광해군일기[중초본] 150권, 3월 26일 甲辰 3번째기사.
원문(발췌): “명나라가 속번 중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여 칙령을 내려 진상품을 주었는데, 사신 홍명원은 간교히 비용 절감을 핑계 삼아 뇌물을 바치고 은혜를 허비하였다… (『병부 제본』에는 ‘우리 가호를 위함인데 조선은 군대 주둔을 괴로워한다’는 말이 있다) 고 하니, 그는 마땅히 큰 은총을 막아 버린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국역: “명나라는 오랑캐(後金) 문제로 조선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진상품과 수만 냥의 은량을 하사했다. 그러나 사신 홍명원은 그 보상을 축소시킬 계획을 꾸며 부정부패로 은명을 허비했다. 결과적으로 명의 칙서조차 제지당하였으니, 진짜 감사의 뜻을 배반한 셈이다. 이같이 망령된 행동에는 그 대가가 있을 것이다”.
해설: 명 사신 홍명원이 조선 방문 시 예물 및 찬차(饌茶) 소모를 축소하는 등의 무례로 명나라에 누를 끼쳤다는 상소이다. 관료들은 명이 조선에 베푼 호의를 열거하면서 홍명원의 “간교한 꾀”와 “모함”이 은혜를 무산시켰다고 비판하고, 홍명원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광해군의 실리외교 기조와도 맞물린 논조로, 공식적으로 명나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비판이었다. 명실록에도 1620년 홍명원의 조선 행차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대체로 “홍명원이 명의 칙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도중에 조선에 머문 행위를 기록”하여 양국 시각의 차이를 보여준다. 청(후금) 측 기록에 이 문제는 없으며, 이 사건은 순전히 조-명 외교 사안이다.
출처: 태백산사고본 33책 229面 (원문), 「광해군일기」 권150。
종합분석
광해군 시기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명·후금 외교 기사를 종합하면, 명과는 전통적 사대 관계를 유지하며 동맹 의무(입조 군역)와 예절(사은)을 강조하는 한편, 후금(건주여진)과는 갈등이 깊어지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조선은 명에게는 임진왜란 구원에 대한 보은의식을 강조하며 협력을 요청받았고, 이에 조선 군병 파병 여부와 시기를 놓고 고심했다. 반면, 후금(여진)은 계속되는 팽창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 내부에서는 그에 대한 경계와 대응책(방비 강화·칭호 문제)을 논의하였다.
명 측과의 서신에서는 ‘부모와 같은 나라’라는 관계를 거듭 확인하며 답신 지연이나 병력 파견에 대한 이유를 해명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반면, 조선 내부 기록에서는 누르하치의 행보를 “적신(赤臣)”, “노적(老敵)” 등으로 규정하며 패배에 따른 치안 유지 방안을 고민하였다. 특히 누르하치(후금 초대 칸)에게 칭호를 부여할지 여부를 논의한 1619년 4월의 기사에서는, 조선이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를 회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조선은 명-후금 간 갈림길에서 명과의 전통적 관계를 중시해 명의 위상을 보호하는 한편, 후금의 부상을 경계하며 내치·군사 충실에 방점을 찍었다.
자료상의 한계로 조선의 모든 활동을 포괄하긴 어렵지만, 광해군의 실리·중립 외교 노선을 뒷받침한다. 명실록·청실록 비교 결과, 조선 실록은 양국 관계를 조선 입장에서 기술하며, 명측 자료는 조선의 반응을 상대적으로 간략히 언급한다. 이를 통해 당시 조·명·후금 삼국 간 힘의 변화와 외교적 긴장관계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결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광해군 시기 명·후금 외교 기사는 조선의 명·후금 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미묘했음을 보여준다. 광해군은 “명과는 사대 관계를 굳건히, 후금과는 경계를 유지”하며 국가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본 연구에서 수집한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 조선은 명의 지원에 감사하며 병력 요청에 응하려 했으나, 전쟁 상황과 국내 사정을 고려해 신중하게 협력했다. 명 측의 요구에 답하는 방식으로 조선의 예속적 의무와 현실적 한계를 동시에 강조하였다. 또한 명 사신의 예우에 세심한 신경을 써, 회답 지연 시 엄정한 처신을 권고받기도 했다. 즉, 명은 조선 외교의 우선순위였으며, 양측 관계는 종종 시혜와 부담을 동반했다.
후금(여진)과의 관계: 후금은 명과 충돌하는 건주여진 세력으로, 1618–1619년 전투에서 강홍립의 투항 등을 계기로 조정 내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은 후금을 명의 적으로 간주하면서도, 독자적 군사 행동 능력이 부족함을 인식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외교적 충돌을 회피하려 했다. 특히 공식 문서에서 ‘후금 황제’ 칭호를 삭제한 것은, 조선이 후금의 위상을 은연중 부인하고 명에 충성을 표명하려 한 역사적 선택이었다.
외교 정책 총평: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사대(事大)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거리를 둔 정책을 편 것으로 보인다. 실록기사 분석 결과, 광해군은 국내 안정을 중요시하여 명나라의 일방적인 요청에도 무작정 즉각 응하기보다 여건을 따져 신중히 대응했다. 반면, 후금 관련 사안에서는 후금의 황제 칭호 거부, 군사 대비 논의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실록은 명·후금 양국을 “조선 입장에서 어떻게 상대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연구 결과는 광해군 시기 조선 외교사 재평가에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며, 아울러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이해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부록: 기사 원문·국역 목록
부록에는 본문에서 다룬 핵심 기사 외에, 광해군 시기 명·후금 외교 관련 실록 원문·국역 전체를 연대순으로 수록한다(각 기사에 대해 날짜·권·기사번호·원문·현대 국역을 표 형식으로 제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정리하였다.
(각 기사의 원문과 국역은 국사편찬위원회 실록 DB 및 한국고전번역원 자료를 참조하였으며, 상세 해설 및 명·청 비교 내용은 본문을 참고)
연표 (Mermaid 타임라인)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DB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명실록(萬曆實錄) 및 청실록(淸實錄) 관련 부분 (중국 고문헌 DB).
백낙준, 한국근세사연구 외, 광해군·중립외교 관련 국내외 학술논문.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번역자료.
Sin, Tianrong, “Joseon’s Diplomacy between Ming and Later Ji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2020.
기타 광해군 연구서 및 사료 해설서.
광해군의 외교에 대해 분석을 하려면
그 시대의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의 관계 전체를 면밀히 살펴봐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멍청이가 무작정 광해군을 깍아내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에
본 글을 급하게 작성해봅니다.
살다살다 조선왕조실록을 자기가 확인 가능한 부분만 퍼와서 떠들어대는게 웃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