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142권,
광해 11년 7월 8일 기축 1/3 기사 /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원문
○己未七月初八日己丑體察副使張晩馳啓:
"被擄走回人, 各道都合一千四百餘人, 而至今不絶。
先是, 從弘立渡鴨江者, 精兵凡一萬三千餘人, 投降之後,
將士被厮殺殆盡, 軍卒皆部分于農民(以守之), 故逃還相繼。"
국역
체찰 부사 장만이 치계하기를,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각도를 모두 합하면 1천 4백여 명인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간
정예 병사가 1만 3천여 명이었는데,
투항한 후 장사(將士)는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고
군졸은 모두 농민에게
무더기로 나누어 주어 〈지키게〉 하였으므로
계속 도망쳐 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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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중립 실리 외교라는 것이 파병 병력 2/3가 죽고
나머지는 노비가 되고 그 중에서 또 청에 의해 죽고
도망친 것이 실리 중립 외교라
친일부역민족반역자들에 의해 포장됨.
광해군 실리외교 중립외교 주장하는 근거가
‘강홍립 밀지설’임.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명나라 군대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눈치를 보다가 후금에 투항하라"는
비밀 밀지(관형향배, 觀形向背)를 내려
조선군의 피해를 막았다는 설.
역사적 사실: 이 이야기는
광해군이 내린 것이 아니라,
후대 인조반정 세력(서인)이
광해군을 폐위하기 위해 지어낸
비난용 루머.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해 군대를 항복시켰다"며
폐위의 명분으로 삼았던 죄목이,
현대에 와서 도리어
'실리 외교의 영웅적 증거'로 포장 된 것
광해군일기조차도 항복하라는
밀지를 교서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그런데 저런 말이 왜 나왔을까
명나라 경략(經略)이 조선의 포수(총수)를
다른 부대로 징발하려고 하자,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명나라에 답장(呈文)을 보낼 때
외교적 핑계를 대어 포수를 빼앗기지 않도록
대처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을 조작질 한 것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137권, 광해 11년 2월 3일 정사 2/2 기사
실록 내용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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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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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이 청과 밀약 주장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전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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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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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라는 것이 아닌 승전을 말함.
원문
○下諭于都元帥姜弘立曰:
"當初渡遼軍一萬, 專以兩西精銳抄發,
團束敎練, 將卒相熟, 今難輕易換易也。
毋徒一從天將之言, 而唯以自立於不敗之地爲務。
經略所調炮手, 雖不得不送, 而呈文回答之際,
若曰: ‘我國軍兵, 雖曰滿萬, 成才炮手絶少,
今就其中, 抽出四百, 則東路之勢, 甚孤。
’ 云, 則經略或有不配他營。
還送我國之理矣。
今無一毫持難之色, 而快許入送, 卿之此擧, 恐誤思量。
如遇于承恩往來之便, 使備陳事情,
使之周旋於經略衙門, 俾無分營之患。"
毋徒一從天將之言, 而唯以自立於不敗之地爲務。
"명나라 장수(天將)의 말에만 무조건 따르지 말고,
오직 (조선군 스스로가) 패하지 않을 위치에
자립하는 것(안위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의 임무로 삼으라."
이렇게 사르후 전투가 망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광해군에게 있다 .
궁궐 공사로 병사들에게 줄 군량미도 제대로 안 보내고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이 굶으면서 싸우게 만든 광해군
그런 광해군을 아직도 찬양한다???
물론 임진왜란 때 광해군은 정말 좋은 세자이지만
왕이 된 이후 조선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 받을 짓만 했다.
단종과 정도전의 경우를 보자
단종은 원래 노산군이었다 그러다 숙종 때 단종으로 복권 되었다.
심지여
사육신도 숙종 때 명예회복 됨
김종서는 영조 때 명에회복 됨
정도전은 고종 때 명에회복 됨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 식민지 된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조선을 비난 하는 친일부역민족반역매국노들이 많은 데
조선을 후대 시간이 지나면
진짜 억울한 사람들 명예를 회복 시켜 준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가 그냥 500년 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광해군이나 연산군은 끝까지 복권이 안 되었다.
조선 시대 내내 폭군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현대에서 그렇게 광해군을 칭송하게 되었을까…
이나바 이와키치 <=== 요것 때문이다.
처음이죠…저 것 이름
여기도 저 것을 가르침을 받들고 사는 것들 있더군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876~1940)는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하며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일본의 관변·식민사학자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으로 근무하며
식민사학의 핵심 논리인
'만선사관(滿鮮史觀)'과
'타율성론'을 정립하고 확산시킴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876~1940)는
1908~1914년 만철조사실에서 만주사 연구
1915~1922년 일본군 육군참모본부
육군대학에서 동양사 강의
1922~1937년 조선사 편수회 간사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정당성을 역사로 편수함)
저술사
<< 광해군 시대의 만선관계>>
핵심 내용
"명의 원병 요청을 거부하고
후금과 화친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외교는
현실적이고 백성들에게 은혜로운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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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의 목적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당성을 위해
연구하고 허위 조작 노력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과거 광해군 때
조선인들이 무시한 청나라에 패 했다
그러니 광해군을 본 받아서
중립 실리 외교로 일본을 받들어야 한다.
광해군을 몰아 낸 역사적 잘못을 기억하고
일본 제국과 협력해야 된다"
이렇게 식민사관을 세뇌시키고 지금도
세뇌되어 짖어 대는 강아지들이 많다.
“영화 드라마로 식민사관 배운자들이여 정신이나 차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