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전 대한민국 국군은
국방부 장관 신성모 참모총장 채병덕
이 희대의 무능한 지휘관 2명이 군 최고위에 있으며
스스로 궤멸 중이었습니다.
한국 전쟁 전야까지 장성들 모아서
정신 나간 술 파티를 하던 국방부 장관 신성모와
한국 전쟁 발발 바로 직전 6월 23일에
군 정보부가 긴급 전달한 북한 공격 임박 첩보를 무시하고
군의 경계령을 해제해 버린 것도 모자라
북진통일 하겠다고 허위 보고 올린 채병덕까지
막장 그 자체였죠
그리고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미 대한민국 군의 절반이 휴가 상태였고
그나마 있는 전방 부대도 갑작스런 기습에 허둥지둥 하는 사이
다급하게 국방 장관을 찾았지만 어디 술먹고 뻗은 신성모는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이때 국군 사령부에서 듣게된 신성모 비서의 답변이 가관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전화도 안받으시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해왔는데
책임자인 국방부 장관은 연락 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이 되서야 긴급 소집 된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거짓 보고를 또 합니다.
"우리 국군은 지금 반격 중이면 3~5일이면 북한군을 격퇴하고 거꾸로 북진까지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대통령과 함께 대전으로 튀었죠
이때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 수뇌부를 비롯해
국회의원들 조차도 제대로 된 전황 보고를 듣지 못 했습니다.
결국 북한군이 서울에 들이 닥쳐 함락했을 때
미리 후퇴 못 한 대한민국 정부의 중요 요인들과
무수히 많은 국회의원들 중요 원로 인사들이
북한군에게 생포되어 납북 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헛 짓거리는 한강 인도교 폭파였습니다
사실상 범죄에 가까운 행위였죠
한국 전쟁 발발 고작 3일 만에 도주를 하며 한강교를 폭파했습니다.
이 행동 때문에 그때까지도 한강 이북에서 남아서
북한군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던 대한민국 주력 부대 태반이
졸지에 퇴로가 차단 된 채 궤멸 될 위기에 쳐하게 됩니다.
결국 대한민국 국군은 모든 장비를 한강 이북에 버린 채
맨몸으로 와해 되어 퇴각하는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즉 한강교 폭파 사건으로
대한민국 군대는 개전 시작과 함께 단 3일 만에
국군 전력의 태반을 한강 이북에서 날려 먹었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한강 인도교만 폭파 된 것이고
또 일부만 부셔졌으며 중요한 한강 철교는 폭파 된게 아닌지라
북한군은 공병대 동원해서 금방 수리하고 한강 도하 할 수 있었습니다
즉 국군 전력만 와해 시켜 버리고 민간인 피해만 만든
진짜 아무짝에 쓸모 없는 개뻘짓이었던 것이죠
사실상 대한민국 국군이 궤멸되어 사라진 절체 절명의 시기
일본에 있던 미군 멕아더 장군과 알몬드 소장이
지금 대한민국의 상태를 확인 하기 위해 한국에 급히 왔습니다.
멕아더가 대한민국 군의 방어 전략이 무엇인지 질문하자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그 자리에서 또 정신나간 헛소리를 합니다
"대한민국 청년 200만명을 곧 징집해서 전선에 투입할 것이며 바로 북한군을 몰아 낼 수 있다"
이에 멕아더는 그 자리에서 만큼은
일단 채병덕 참모총장의 패기를 칭찬하고
그날 저녁 대통령과 급하게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당장 저 무능한 참모총장을 해임하시오! "
이게 한국전쟁 개전 직후
미국이 대한민국에 요청한 첫 번째 요구였습니다
이때 시찰로 미국은 한국군 지휘부가 개막장에
실제 전투 전황도 극히 불리한 것을 확인하여 파악했고
한국군이 더이상 북한군을 막을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
당시 미군은 미국 정부에 한반도를 포기하고
제주도로 망명 정부를 세울 것은 건의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을 구했던 2명이 장군이 있으니
한강 방어선의 김홍일 장군과 춘천 방어선 김종오 장군입니다.
김홍일 장군은 한강 이북에서 궤멸되어 흩어진 국군을 수습하여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급히 재건하여 만들었고
이들 병력으로 한강에서 필사적인 저지를 이어갔습니다
한강 퇴로가 끊어진 이후 맨몸으로 도하해서 넘어온 국군장병들이
그야 말로 패닉 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었었을 때
김홍일 장군은 일단 장병을 먹여야 한다며 식량을 공수해서 보급하고
군대를 수습하여 필사적인 저항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도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겨
김홍일 장군에게 3일만 방어를 성공해 달라 부탁했을 정도였지만
결사항쟁으로 분투하여 일주일 이상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전장으로 시찰 나왔던 미국의 멕아더 장군이
이때 대한민국 장병들의 결의를 인상 깊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결정적인 성과를 낸 것이
춘천에서 북한군을 막은 김종오 장군입니다.
이때 북한군 전략은 위 지도와 같습니다
주력 병력을 동원해 한 축이 서울을 함락하고
또 다른 축은 춘천을 함락한 후 측면으로 수원까지 진격해
대한민국 군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였다면 대한민국 국군은
모두 서울 부근에서 증발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북한군 침공 전략의 가장 중요한 이 포위 계획을
대한민국 김종오 장군이 방어해 지연시키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3대 대첩 중에 하나인 춘천 전투 승리입니다.
북한군 2군단의 파상 공세를 김종오 장군 6사단이
열악한 장비와 3배 이상 열세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6천명 이상을 사살 시키며 막아낸 것이죠
이로 인해서 북한은 남한 침공 작전 전체가 뿌리 부터 흔들렸고
중요 진격 루트인 춘천 방면 북한군의 남하가 모두 저지 되면서
북한군은 서울을 초기에 빠르게 함락는 성과를 내고도
더이상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 하게 됩니다.
주공인 서울 쪽 북한 부대들은 전진을 멈추고
개전 초기 급박하고 중요한 와중에
장장 3일을 시간을 서울에서 버리며 허비하게 된 것이죠
김종오 장군이 만든 이 전투의 결과로
전쟁 초반에 국군 주력이 궤멸 되며 와해 되었을 때
대한민국 국군은 김홍일 장군을 중심으로
3일 동안 퇴각한 전방 부대와 장병들을 수습해
한강 방어선을 재구축 할 수 있었고
이후 대한민국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연결되는
한국군의 지연 전술과 방어 작전을 수립하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더불어 이 소식은 미국에게도 전해졌습니다.
한국군 춘천 전투의 결과로 북한군의 남하가 저지 되자
미국은 아직 한반도를 방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판단
제주도 망명 정부 계획을 전면 폐기하고
일본 주둔 미군을 긴급 파병하는 결정을 내리리게 됩니다.
이 조치는 유엔군의 한국 파병과 미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전세를 역전하는 계기가 마련 됩니다.
김종오 장군은 춘천 방어전 뿐만 아니라
이어진 지연 전에서 꾸준히 북한군을 타격해
남한 국군 최초로 북한군 상대로 승전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 전에서도 참여하여 북한군을 격퇴 시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