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부터 2024년까지 71년간, 세계 주요 언론들이 본 한국경제 발전사]
🇰🇷👍전쟁으로 최빈국에서 출발한 한국이 선진깅국이 된 기적!
(60,70,80대가 평생 살아온 삶 자체가 한국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후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1950년부터 3년간의 전쟁이 한반도에 남긴 것은 거의 없었어요.
건물은 무너졌고 다리는 끊어졌으며 사람들은 집을 잃었습니다.
**1953년 10월 영국 가디언지의 특파원 제임스 카메론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본광경을기사로 썼어요.
*거리마다 무너진 건물들뿐이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사람들은 판잣집과 천막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맨발로 돌아다닌다.
겨울이 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어 죽을지 상상조차 끔찍하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어요. 서울 인구 100만 명 중 60만명이 판자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수도가 없었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1953년 11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한국은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이건 그냥 폐허다. 원조로 연명하는 거대한 난민촌일 뿐이다.
숫자로 보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였어요. 당시 세계 최빈국으로 꼽혔습니다.
에티오피아가 70달러였습니다. 한국이 에티오피아보다 가난했던 겁니다. 산업시설은 거의 다 파괴됐어요. 전쟁 전에 있던
공장 600개 중 500개가 폭격으로 망가졌습니다.
남은 공장도 돌아갈 전기가 없었고 전기가 있어도 돌릴 기술자가 없었어요.
**1954년 3월 미국 타임지가 한국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제목이 충격적이었어요.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파괴된 나라.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전쟁 전 남한 인구는 약 2천만명이었는데 북쪽에서 피난온 사람들까지 합치니 2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좁은 땅에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만 넘쳐났어요.
** 1955년 1월 세계은행이 한국에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6개월간의 조사를 마쳤습니다. 그들이 낸 보고서의 결론은 냉정했어요.
이 나라가 자립 경제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 30년간은 지속적인 국제 원조가필요하며 그마저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30년간 원조를 받아도 성공을 장담 못 한다는 겁니다. 당시 국제 사회의 시각은 명확했어요. 한국은 영구적인 원조 대상국이 될 거라는 거였죠.
**1957년 4월 일본의 한 경제학자가 도쿄대학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이 우리 일본 수준의 경제를 이루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조차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었으니까요. 먹을 것도 없고 일할 곳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절망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세계가 주목하지 않은 곳에서요.
**1955년 9월 한국 정부가 이상한 결정을 하나 내립니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한 겁니다. 나라에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학교부터 짓기 시작했어요.
** 1956년부터 1960년 사이 한국에 세워진 학교 수가 무려 3247개였습니다. 하루에 2개씩 학교가 생긴 셈이에요.
판자집 마을에도 학교가 들어섰고 산골 마을에도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57년 8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이 경기도의 한 시골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가 흥미로웠어요.
한국 정부는 우선 순위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빵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를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맞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교육이 무슨 소용이냐는 거죠.
하지만 한국은 멈추지 않았어요. 1958년 서울 청계천 판자집 마을에 야학이 생겼습니다. 낮에 일하느라 학교에 못 간 어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야학에 모였습니다.
**뉴욕타임스 특파원이 1958년 11월에 이 야학을 취재했습니다. 그가 본 광경은 이랬어요.
40대 노동자가 10대 학생 옆에 앉아 한글을 배운다. 전구 하나 아래서 30명이 공책에 글씨를 쓴다. 이들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배우려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알았던 겁니다. 배워야 먹고 산다는 걸요. 글을 읽어야 기술을 배울 수 있고 기술을 배워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1959년 놀라운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진 겁니다. 불과 6년 만에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50% 가까이 늘어난 거예요.
유네스코가 한국의 교육 현황을 조사 했습니다.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한국만큼 짧은 시간에 문맹률을 낮춘 나라는 전례가 없다. 국민의 교육열이 경제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경제 수준을 초과하는 교육열,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배우는 건 멈추지 않았어요. 굶어도 아이들은 학교에 보냈습니다.
**1960년 3월 한국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6%를 돌파했습니다. 같은 시기 인도는 61%, 필리핀은 72%였어요.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이었는데도 취학률은 한국이 더 높았던 겁니다.
하지만 1960년 국제 언론의 평가는 여전히냉정했습니다.
**1960년 1월 뉴욕타임스헤드라인이에요. '한국 7년째 원조 의존'
자립 경제는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세계는 여전히 한국을 끝난 나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아무리 많이 지어봤자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들은 몰랐습니다. 195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196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갈 거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완전히 바꿔 놓을 거라는 것을요. 1960년이 끝날 무렵 한국은 여전히 가난 했습니다.
여전히 원조에 의존했고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씨앗은 뿌려져 있었습니다.
교육이라는 씨앗이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에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할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1961년 1월 1일
한국의 수출액은 3,290만달러였습니다. 수입액은 3억 4300만 달러였어요. 10배 이상 차이가 났죠. 한국이 수출하던 것들은 뭐였는지 아세요? 텅스텐 원석, 생선, 김, 그리고 가발이었습니다.
**1961년 1월 13일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섰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격적인 선언이 나왔어요.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 계산기를 두드려 볼까요? 3,29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면 30배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10년 만에요.
**1961년 9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소식을 듣고 기사를 썼습니다.
비현실적인 목표, 한국 정부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원조 없이는 생존도 어려운 나라가 수출 강국이 된다는 건 환상입니다. 냉정한 평가였죠. 실제로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한국에는 팔만한 게 없었어요. 공장도 별로 없었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시작했습니다.
**1962년 1월
울산의 첫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아무 것도 없던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그냥 바다와 모래사장뿐이었죠.
**1962년 5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이 울산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예요.
황량한 해변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인프라도 없고 숙련노동자도 없다. 대체 무엇을 만들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맞았어요. 당시 한국 사람들도 잘 몰랐습니다.
뭘 만들어 팔아야 할지요. 그냥 일단 공장부터 짓고 있었던 거예요.
** 1963년 11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한국인 123명이 내렸습니다. 광부들이었어요. 탄광에서 일하러 온 젊은이들이었죠.
**1964년 12월에는 간호사 130명이 독일로 떠났습니다. 독일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들이 버는 돈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송금됐습니다. 1965년 1월 독일 스피겔지가 한국인 광부들을 취재했습니다.
기사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들은 지하 1000 m 갱도에서 일한다. 위험하고 힘든일이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는다. 모두 조국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땅 밑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꺼리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한국 청년들은 그 일을 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요.
**1964년부터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가 7936명 간호사가 1만 1057명 이었습니다. 그들이 보낸 돈이 1억 달러가 넘었어요.
그 돈을 모두 공장설립에 투자했습니다.
**1965년 6월22일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이 체결됐습니다. 이게 얼마나 논란 이었는지 아세요? 서울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어요.
왜 일본과 손을 잡는 거예요? 식민지 시절에 당했던 나라잖아요.
그런데 또 일본과 손을 잡는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정부는 밀어 붙였습니다.
**1965년 8월 뉴욕타임스가 이렇게 썼어요.
한국은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감정보다 경제를 택한 것이다. 과연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까?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에서 기술과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기술자들이 일본 공장으로 연수를 갔어요.
몇 달씩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왔습니다.
**1966년 3월 일본 니케이 신문이 한국 연구생들을 취재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메모를 엄청나게 한다. 작은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퇴근후에도 숙소에서 공부한다. 이런 열정은 전후 일본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배우려는 열망이 대단했던 겁니다. 일본 기술자들도 놀랄 정도였어요.
**1965년 10월 베트남에 한국군이 파병됐습니다. 이것도 엄청난 논란이었어요. 전쟁이 끝난지 겨우 12년 만에 또 전쟁터로 가는 거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대가로 받은 달러가 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군인들 월급, 군수 물자 조달, 건설 프로젝트까지요. 1965년부터1973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이 10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1966년 8월 미국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이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느낀 분위기가 독특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미친듯이 일한다. 공장은 밤낮 없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일한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근무 시간은 주 60시간이 넘었어요. 하루 12시간씩 일주일 내내 일했습니다.
** 1967년 4월1일 포항에 제철소건설이 시작됐습니다. 세계은행이 이프로젝트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한국에는 철광석도 없고 석탄도 없다. 제철소를 지어봤자 경쟁력이 없을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투자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세계은행이 반대한 겁니다. 경제성이 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했냐고요? 일본에서 돈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었어요.
**1968년 2월1일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km. 당시로서는 엄청난 프로젝트 였어요.
** 1968년 3월 영국 로이터통신이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한국은 자동차도 별로 없는데 왜 고속도로를 만드는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1968년 한국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2만 7천 대였어요.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이 넘는데 자동차는 겨우 2만 대였죠. 그런데도 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자동차가 없으니까 고속도로를 안 만드는 게 아니라 고속도로가 있어야 자동차가 늘어난다는 논리였어요.
**1968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의 차이퉁 기자가 경부고속도로 공사장을찾았습니다. 그가 본 광경이에요.
수천 명의 인구가 삽과 곡괭이로 산을 깎는다. 대형 장비가 부족해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공사 속도가 놀랍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습니다.
세계 건설사에서도 기록적인 속도였습니다.
1969년 들어서면서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출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거예요.
**1969년 1월 한국의 수출액이 5천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섬유, 가발, 전자제품들이 미국으로 쏟아져 나갔습니다.
(확인 요망, 수출실적 불명확.
**1969년 11월 30일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한 겁니다. 정확히는 10억 240만 달러였어요. 1961년에 세운 목표 기억하시죠?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 정확히 8년 만에 달성했습니다.
**1969년 12월 2일 영국파이낸셜타임스가 일면에 큰 기사를 실었습니다. 우리가 틀렸다. 비현실적이라고 했던 그 목표를 8년 만에 달성했다. 이것은 경제의 기적이다. 비현실적이라고 했던 그 신문이 틀렸다고 인정한 겁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한국이 여기서멈추지 않았다는 거예요. 1970년 1월 1일 새로운 목표가 발표됐습니다. 1980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 달성 또 10배 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외신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놀랍게도조용했습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를 지켜본 그들은알아버렸거든요. 한국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걸 진짜로 해낸다는 걸요. )
**1970년 12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어요.
한국 더 이상 원조 대상국이 아니다.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떠올라
10년전만 해도 자립 불가능하던 나라가 이제 신흥공업국이 된 겁니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이제 공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거예요. 글을
읽을 줄 알고 계산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요. 그들이 1970년대 한국을 완전히 바꿔놓게 됩니다.
1971년 3월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에서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현대조선소 건설 기공식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상황이었습니다.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 회사가 조선소를 짓겠다고 나선 겁니다.
조선소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설계도도 없었어요.
그냥 모래 사장만 있었습니다.
**1971년 6월 영국로이드 선급협회 조사단이 울산을 방문했습니다. 로이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선박 인증 기관이에요. 그들이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만들려고 한다. 도면도 제대로 없다. 경험있는 기술자도 거의 없다. 이건 미친 짓이다.
로이드조사단의 보고서에 실린 내용입니다. 실제로. 미친 짓처럼 보였어요. 보통은 조선소를 먼저 완성하고 그다음에 배를 만들었습니다.
현대는 두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었던 겁니다. 1972년 3월 현대 조선소에 유럽에서 기술자들이 왔습니다. 스코틀랜드 조선 엔지니어들이었어요. 한국 기술자들을 교육하러 온 거였죠.
** 1972년 6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패럴드지가 이 엔지니어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하루 16시간씩 일한다. 주말도 없다.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 가지를가르쳐주면 10가지를 물어본다. 배우려는 열망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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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현대 조선소 기술자들은 정말 잠을 안잤습니다. 낮에는 외국 엔지니어한테 배우고 밤에는 설계도를 그렸어요. 새벽까지 토론하고 아침이면 다시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1973년 6월 28일 현대조선소에서 첫 배가 진수됐습니다. 26만톤급 유조선 애틀랜틱베로노
였어요. 발주한 건 그리스 선주였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였습니다. 용접이 안 맞아서 수백 번을 다시 했어요 철판이 휘어져서 밤새워 수리 했습니다.
외국 엔지니어들이 불가능하다고 한 부분을 한국 기술자들이 밤새 연구해서 해결했어요.
**1973년 7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현대조선소를 취재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들, 매뉴얼에 없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 매뉴얼을 만든다. 이들에게 불가능은 없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일 뿐이다.
정확한 관찰이었습니다.
한국 조선기술자들은 문제를 만나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1974년 들어서면서 한국 조선업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 했습니다. 납기를 지킨다는 소문이었어요. 다른 나라 조선소들은 배 건조가 자주 지연됐거든요. 6개월 1년씩 늦어지는 게 흔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어요. 약속한 날짜에 배를 인도했습니다. 심지어 조금 일찍 인도하는 경우도 있었죠.
** 1975년 3월 일본 NHK신문이 한국 조선업을 분석한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한국조선소의 비밀은 완벽주의다. 작은 부품 하나에도 불량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이게 바로 한국식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빠르지만 정확하고 싸지만 품질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이요.
**1975년 7월 포항 제철소가 본격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1968년에 착공해서 7년 만이었어요. 세계은행이 반대했던 그 프로젝트 기억 하시죠?
**1975년 9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포항제철을 취재했습니다.
설계은행이 틀렸다. 포항제철은 가동 첫 해부터 흑자를 냈다. 철광석도 석탄도 없는 나라에서 만든 철강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비결은 역시 완벽주의였습니다.
포항제철 노동자들은 불량률을 0에 가깝게 만들려고 했어요. 조그만 흠집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1976년 1월 한국산 전자제품이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어요. 또 하나의 싸구려 아시아 제품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몇 년 지나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산 제품의 고장률이 일본산보다 낮았던 거예요.
1978년 11월 미국 소비자 리포트가 TV. 신뢰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과가 충격적이었어요. 한국산 TV가 일본산보다 고장이 적었던 겁니다.
**1978년 12월 뉴욕 타임스가 한국전자제품 공장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건 드라마였어요.
완벽한 제품을 만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일본 도요타의 시스템과 비슷했죠. 하지만 한국은 거기에 뭔가를 더했습니다. 바로 속도였어요. 문제를 발견하면 멈추지만 해결은 더 빨리 했습니다.
**1977년 12월 한국에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970년에 세운 목표가 1980년까지 100억 달러였죠. 3년 일찍 달성한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수출 품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예요. 1960년대에는 가발 생선 김 같은 게 주력이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에는 배 자동차 전자제품 철강이 주력이 됐어요.
** 1978년 6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저임금 국가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기술 국가다. 품질에서 일본을 추격하고 있다.
2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희망 없다던 나라가 1970년대에 기술 국가가 된겁니다
**1979년 3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 차이통이 한국 공장들을 취재했습니다. 기자가 가장 놀란 게 뭐였는지 아세요?
현장 노동자들이 설계도를 읽을 줄 안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다. 이건 단순 노동자가 아니라 기술자 수준이다.
1950년대에 미친 듯이 지었던 그 학교들 기억나시죠? 그 학교를 나온 젊은이들이 197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계산을 할 줄 알았어요. 매뉴얼을 이해했고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 1979년 여름 현대자동차가 캐나다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포니라는 모델이었어요. 한국이 독자 개발한 첫 자동차 였습니다.
1979년 8월 캐나다 글로브 앤 메일지가 포니를 시승한 후 기사를 썼습니다.
놀랍다 한국차가 이 정도 품질일 줄 몰랐다. 일본차 모델보다 완성도가 높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역시 완벽주의였습니다. 현대자동차 연구원들은 수천 번의 테스트를 반복했어요. 고장 나는 부분을 찾아내서 계산했습니다. 완벽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어요.
**1979년 10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700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953년 67 달러였던게 26년 만에 25배가 된 겁니다.
같은 달 프랑스 파이낸셜타임스가 특집을 실었어요.
한국의 비밀은 교육받은 노동력과 완벽주의의 결합이다. 이들은 단순히 눈이 빠른 게 아니라 정확하다.
**하지만 1979년 말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2차 오일쇼크가 터진 거예요. 석유 가격이 3배로 뛰었습니다. 전 세계가 경제 위기에 빠졌죠. 한국도 마찬가지였어요. 석유를 전부 수입에 의존했으니까요.
**1979년 12월 월스트리트 저널이 한국 경제를걱정하는 기사를 냈습니다.
한국 경제 오일쇼크로 위기, 성장 둔화 불가피,
실제로 1980년 한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경제가 후퇴합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세계는 다시 한번 한국을 지켜봤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끝인가? 20년간의 기적이 여기서 멈추 는 건가?
그런데 한국은 또다시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위기 속에서 더 과감한 도전을 시작한 거죠.
그리고 그게 1980년대를 만들게 됩니다. 1980년 한국은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경제는 마이너스 5.2% 성장, 오일쇼크로 물가는 치솟고 실업자는 늘어났죠. 거기에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혼란스러웠어요.
1980년 5월 광주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외신들이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어요.
**1980년 6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특집을 냈습니다.
한국의 고속 성장은 끝났다. 정치 불안과 경제 위기가 겹쳤다. 이제 장기 침체가 시작될 것이다.
현실적인전망이었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20년간 달려온 경제가 멈춰 선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1981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경제가 다시 6.4% 성장을 기록한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비밀은 중동에 있었습니다.
1981년 한국 건설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따내기 시작합니다.
**1981년 3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사우디 아라비아를 취재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한국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있다. 5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공사는 계속된다. 중동 발주처들이 한국 건설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납기를 지키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배와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쌓은 건설 기술이 1980년대 중동에서 빛을 발한 겁니다. 그 돈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1984년 한 해에만 중동에서 벌어들인 돈이 137억 달러였습니다. 엄청난 금액이었죠. 그런데 한국은 그 돈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또 투자했습니다.
뭐에 투자했을까요? 바로 반도체였습니다. 1983년 2월 삼성이 64KDRAM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현대전자가 설립됐어요. 두 회사 모두 반도체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은 일본과 미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어요. 일본의 NEC, 도시바, 히타치, 미국의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이들이 시장을 나눠 가졌죠. 한국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1983년 9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이렇게 썼어요.
삼성과 현대의반도체 도전은 무모하다. 일본과 미국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한국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냉정한평가였습니다. 실제로 말이 안 되는 도전처럼 보였어요. 반도체는 기술 집약 산업이거든요. 막대한 연구개발비가 필요하고 수율을 높이는 데만 몇 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한국은 특이한 전략을 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