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멸망할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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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멸망할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최고관리자 0 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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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당장 조선의 정권을 잡고 있었던 고종과 민비 정권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군사들 월급까지 횡령하는 군납비리로 인해서 모래와 돌이 섞인 밥을 먹어야 했던 군인들이

참다못해 일어나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런 구식 군인들 반란 하나 스스로 진압하지 못한 고종과 민비정권이 청나라군을 끌여들였고 결국 청나라군의 힘으로 반란을 진압한 조선

은 이일로 인해서 청나라에게 내정간섭을 당하는 사실상 청나라의 속령으로 전략하게 되고 청나라에서 보낸 사실상 조선총독이나 마찬가지였던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온갖 갑질과

내정간섭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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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조선의 고종과 민비의 무능과 부패를 참다 못한 김옥균의 개혁파들이 군대를 일으켜 정변을 일으키자 그걸 자신들의 힘으로 진압하지 못한 조선조정은 또다시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또다시 청나라의 군대의 힘을 빌려 간신히 정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고 이일로 인해서 조선조정은 또다시 청나라의 손을 빌려 자신들의 내부 문제를 진압한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의 조선조정에 대한 내정간섭은 더더욱 심해지게 되고 이일로 인해서 조선은 훗날 조선몰락의 원인이 되는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한성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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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일어 3번째로 터진 조선내 난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당시 고종과 민비 정권의 부정부패로 신음하던 조선의 백성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켰고 당시 형편없었는 조선관군은 주로 죽창과 낫으로 무장한 농민군 하나  제대로 진압을 하지 못해서 연전연패하고 조선의 핵심 도시이자 호남의 중심지인 전주까지 농민군에게 함락당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선조정은 또다시 청나라에 군대파병을  요청했는데 여기서 갑신정변과 임오군란과 다른 문제가 터지게 된다. 바로 갑신정변때 일본과 청나라가 맺었던 한성조약으로 인해서 한쪽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으로 나머지 한쪽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다는 한성조약의 내용에 따라서 일본군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수 있게 된것이다. 더더욱 가관인건 당시 고종과 민비는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도 청나라에 군대 파병 요청을 한것이다. 아마 당시 고종과 민비는 어떻게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를 싸워서 이길수가 있겠어? 일본군이 와서 문제 일으킨다고 해도 청나라 군대 동원해서 해결하면 되지라고 안이하게 생각을 했고 이런한 당시 조선조정의 판단은 명백한 오판으로 이러한 절호를 기회가 찾아오자 당시 이토 내각이 이끄는 일본정부는 곧바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서 손쉽게 경복궁을 점령해서 한양을 접수했고 이에 항의하는 청나라의 요구를 가볍게 무시하고 오히려 청나라에 먼저 전쟁을 걸어서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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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땅에서 일어난 전쟁인 청일전쟁


청일전쟁은 조선조정의 예상과 정반대로 일본군의 일방적인 압승으로 끝나게 되고 이러한 이유는 당시 청나라 군대는 무늬만 근대화를 완료한 강군처럼 보여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당시 썩을대로 썩은 청나라 조정에서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을 자행하고 당시 청나라의 사실상 실권자였던 서태후가 국가의 군비까지 횡령해서 이화원을 짓는데 사용해서 청나라군이  대포를 쏘아도 대포의 포탄이 터지지 않는 막장 상황들이 벌어지는등 청나라군은 이미 내부부터 오래전에 썩을대로 썩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한심한 청나라만 보다 못해서 그런 청나라에 손을 빌려서 청나라에 내정간섭을 당하는 조선이 얼마나 당시 한심한 국가였는지 알수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승을 거두면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포기하고 일본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자신들 영토인 대만까지 토해내서 조선은 자신들의 힘이 아닌 사실상 일본제국의 힘으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실상  조선의 잘못된 판단으로 조선 스스로 자신들 영토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싸울 빌미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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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이에 일본제국이 청나라를 대신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려고 하자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또다시 군대를 일으켜서 이미 한양을 접수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한양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지만 우금치에서 이미 대기중인 일본군과 일본군에게 이미 접수를 당한 상태인 조선관군에게 압도적인 화력차이와 전술차이로 일본군과 조선관군이 운영하는 무라타 소총과 암스트롱 대포와 개틀링기관총에 의해서 그야말로 바람앞에 쓸려나가는 낙엽처럼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면서 쓸려나가면서 사실상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우금치 전투에서 2만명에 달하는 농민군이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고 생존자는 3000명에 불과한데 반해서 일본군의 전사자는 0명으로 아무런 손실도 없었고 조선관군의 전사자, 손실역시 거의 없다싶이 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보다 먼저 보신전쟁이나 세이난 전쟁같은 내전이 터져서 내전을 치루었지만 보신전쟁당시 토막파인 메이지 정부군측은 전쟁이 장기화되면 서구열강들이 간섭할   것을 우려해서 항복하는 막부측 인사들은 사면해 주는건 물론 능력만 있으면 정부요직에 임명해주는 등 너그러운 조치로 최대한 적의 항복을 요구하면서 싸워서 에도막부측과 협상을 통해서 막부의 쇼군과 에도성의 항복을 받아냈고 막부측도 자신들이 전쟁에서 밀린다고 해도 절대로 외세의 군대를 끌여들이지 않아서 일본은 외세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전에 자신들 내전을 빨리 끝낼수 있었고 반란을 일으킨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측 사츠마 반군이 자신들이 전쟁에 밀려도 차라니 죽을지 언정 절대로 외세의 군대를 끌이들이지 않았다. 보신전쟁당시 막부군측에 고용된 소수에 외국군대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당시 막부측이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형태였지 조선처럼 직접 타국에서 국가주도로 군대를 파견해서 외세의 군대가 간섭한 적은 없었다. 당시 일본의 지도부는 자신들 내부의 문제에 외세의 군대가 간섭하면 그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끼리 내전이 터져도 절대로 외세의 군대를 끌어들이지 않고 외세의 군대가 간섭하기 전에 미리 먼저 최대한 빨리 자신들의 내전을 끝낼 정도로 국가의 지도부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비전이 확실했었는데 비해서 당시 조선조정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등 조금만 자신들 내부에 문제가 터지면 그걸 아무런 대책도 없이 외세의 군대를 끌여들여서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 스스로 외세가 간섭할수 있는 충분한 빌미를 마련해주었고 이러한 결과는 결국에는 조선이 멸망하고 외세의 지배를 받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병법에도 이르기를 자신들이 무너지지 않는건 자신들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지만 반대로 적을 무너뜨릴수 있는 기회는 적 스스로 초래한다고 나와있다. 즉 어떤 국가나 군대가 무너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적이 아닌 자신들 스스로가 초래한다는 말이다. 명나라가 멸망한 것 역시 청나라 때문이 아닌 사실상 명나라 내부의 넘쳐나는 문제들과 무능과 부패로 인해서 사실상 스스로 무너진것처럼 조선이 멸망한 것 역시 사실상 조선 내부의 넘쳐나는 문제들과 무능과 부패로 인해서 스스로 무너진것 이라고 할수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이였던 양계초역시 조선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을 망하게 한건 조선 스스로 였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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