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실리 중립 외교는 제대로 된 판단인가

유머/이슈

광해군의 실리 중립 외교는 제대로 된 판단인가

최고관리자 0 1 07.04 14:03

2374cb7fccd1bb0d32a5e7636ed47b66_1783141385_9858.jpg

1607년 해서여진의 강력한 부족인 울라부

위 지도에서 함경도 종성을 근거로 하는 여진족

후금(청나라)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울라부의 수장인 부잔타이 세력을 진압하고

울라부를 병합.

최종 병합 시기: 1613년 울라 성 함락

이 병합을 통해 막대한 인구와 군사력을 확보한

누르하치는 3년 뒤인 1616년 후금(後金)을

공식 건국하고 자신이 황제라 선포함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짓기로 결정하고

터를 보게 한 것은 1616년(광해군 8년)이며,

본격적으로 궁궐의 기초를 세우고 담장을 쌓는 등의

실제 공사가 시작된 시점은 1617년(광해군 9년) 봄

7a41181ed3c78c11b81f6483d0cf2494_1783141386_168.jpg

1618년 4월 후금(後金)이

명나라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며 가장 먼저 전격 격파하고

점령한 곳은 바로 명나라의 요충지 무순성

명나라 병부시랑 겸 요동경략 양호와 총독 왕가수는

조선에 군사를 보내 함께 후금을 협공하자고 요구

광해군이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기 위해 내세운 핵심 논리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칙서)이 아닌,

지방 관료의 개인적인 요청일 뿐이다"라는 명분

1618년(만력 46년) 5월,

후금의 누르하치는 범하(파나하), 화표충(후와보오충),

삼차아(산차라) 등 크고 작은 17개 요충지

및 성보를 연이어 함락시킴.

송산둔성을 항복시키고,

저항하는 주변 4개의 성을 포위 공격하여 격파했습니다.

이것으로 후금이 요동 지역을 장악함.

1618년(광해군 10년) 6월에

명나라 만력제의 칙서가 조선에 도착

명나라가 조선에 공식적으로 원병(파병)을 요청.

e87ac06a3c7dd8cef9fccf7cab87a760_1783141386_3278.jpg

1618년(광해군 10년) 7월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핵심 요충지인 청하(淸河)성을 함락

(빨간색 지역임)

명나라 요동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조선-명나라 간의 전통적인 육상 교통로를

사실상 차단함.

1619년 2월 조선군 파병 조명연합군 진군

« 광해군의 대처»

경복궁(755칸) 규모의 10배가 넘는 궁궐 공사

광해군 8년에 시작한 경덕궁(경희궁),인경궁,자수궁

인경궁 +경덕궁 = 7,000칸임 거기에 자수궁

이 공사를 광해군 8년 서기 1616년에 동시 시작함.

후금이 여진족 통일하고 국방에 큰 위험이 있으면

국방력을 강화해야지 궁궐을 강화함.

방어성 강화도 아님 궁궐 공사임.

광해군 폐위 1623년인데 그 때까지도 궁궐 공사 하고 있었음.

경복궁 755칸인데 인경궁 5500칸까지 완공 직전에

인조 반정으로 공사 중단 시킴.

이게 실리 외교 중립 외교라 할 수 있음 .

저 공사 하느라 파병 가는 병사들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음

1919년 파병 결정으로 사르후 전투에서 병사 2/3가 전멸하고

산에 포위 되어 2일 굶고 항복한 것이 중립 외교???????????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원문

광해군일기[중초본] 127권,

광해 10년 윤4월 19일 丁丑 (두 번째 기사)

광해 10년(1618년) 윤4월 19일은

서기 1618년 6월 12일 (수요일)

1618년(광해군 10년) 6월 명나라 만력제의 칙서가

조선에 도착한 날짜는 6월 19일

[한문 원문]○備邊司啓曰: "……

今者, 奴賊跳梁, 遼事日急, 變告在呼吸之間.

納餉練兵, 實爲今日之急務. 而前日所定赴防之卒,

尙未起發, 兵粮亦無辦備之處, 臣等不勝憂慮. ……"

[정식 국역]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오랑캐 적들이 날뛰어 요동의 사태가

날로 위급하니(遼事日急),

변란의 고함이 호흡하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變告在呼吸).

군량을 수납하고 병사를 훈련하는 것(納餉練兵)이

진실로 오늘날의 급선무(急務)입니다.

그러나 전일에 정한 변방으로 갈 군사들은

아직 출발하지 못했고,

군량 또한 마련할 길이 없으니

신 등은 우려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

《광해군일기》 중초본 131권,

광해군 10년 8월 7일 기사에 기록

비변사가 아뢰기를,"지금 들으니 청하성(淸河城)이

이미 함락되었고, 요동(遼東) 전체가 뒤흔들려

안팎이 무너질 듯 위태롭다고 합니다.

저 흉포한 오랑캐(후금)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데,

우리 국경과의 거리는 불과 며칠 길밖에 되지 않습니다.

국경에 이미 불이 붙었으니

그 화리가 조만간 도성(한양)까지 번질 것입니다.

무릇 나라를 가진 자가 이러한 급박한 재앙을 당했다면,

마땅히 먹는 것도 잊고 잠도 자지 않으며

오직 군사를 정비하고 변방을 방어하는 데

온 힘을 쏟아도 오히려 모자랄까 두려운 법입니다.

어찌 방 안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집 고치는 일(궁궐 공사)에만 마음을 두고,

눈앞에 닥친 타오르는 불길은

구원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하옵건대 인경궁(仁慶宮)의 역사(토목 공사)를

즉각 완전히 정지하시고,

모든 재원과 인력을

변방의 방비와 군량 조달로 돌리소서."

한문 원문

備邊司啓曰,"今聞淸河已陷, 遼左震動,

內외(內外) 杌隉.彼凶醜 乘破竹之勢, 距我疆場,

不過數日之程. 邊燧已爇, 禍及將至.凡有邦國 遇此急灾,

當廢食憂嘆, 惟以修兵備邊爲急,

猶懼不及.豈可逡巡 留意於修家,

而不思救目下之爇乎!請卽罷仁慶宮役,

專力於防邊運糧."

1618년(광해군 10년) 8월,

사헌부와 사간원(양사)의 대간(언관)들이

대규모 궁궐 공사를 강행하는

광해군에 맞서 집단 사직서(사피)를 제출하며 올린

조선왕조실록(광해군일기)의 원문

《광해군일기》 131권,

광해군 10년 8월 9일 자 기사 기록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하들이 아뢰기를,

"방금 비변사의 계사를 보건대

변방의 긴급함이 눈앞에 닥쳤으니,

참으로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하여

구원하더라도 미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국가의 대책으로는

오직 궁궐 공사(인경궁 역사)를 완전히 정지하고,

그 자금과 물력, 인력을 모두 군사를 조련하고

요동을 방어하는 방책[練兵禦遼之策]으로 돌려,

군량과 군기를 마련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

대신들과 비변사가 이미 눈물을 흘리며

지극하게 간청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중략)눈앞에 나라가 망할 위기가 닥쳤는데도

간관(언관)의 직책을 맡아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

저희는 더 이상 조정을 더럽히며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신들의 관직을 거두어 주소서."

한문 원문

兩司啓曰,"임(仍)觀備邊司啓辭, 邊急在目,

誠恐擧國동心(同心) 救지不及.今日之策,

莫急於罷仁慶宮役, 移其財力, 全爲練兵禦遼之策,

以爲儲糧治兵之資.大臣·備局, 旣已泣血至懇,

而殿下終不允許. (중략)職在規諫, 不能回天,

臣等無任汚朝. 請免臣職."

전란과 궁궐 공사에 대해

광해군의 묵살 방식

광해군의 묵살 논리: "국가 대계이니

다시 아뢰지 말라"신하들이 청하성 함락 및

대외 안보 위기를 이유로

영건(궁궐 공사) 중단을 강력히 주청할 때마다,

광해군은 이를

"실로 어쩔 수 없는

국가의 큰 계획(大計)"으로 규정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勿復煩達)"며 원천 차단

광해군일기 126권 (중략) 영건 사업에 대한 전교

"新築兩殿, 蓋因大內有事, 實出於不得已。…

營建大計, 決不可中輟。

"국역: "새 궁전을 건축하는 공사는

대개 대내(大內)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실로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된 것이다.

… (중략) … 궁궐을 짓는

큰 계획(大計)은 결코 도중에 그만둘 수 없다.

광해군일기[정초본]128권,

광해 10년 5월 1일 戊子 9/9 기사 /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경덕궁 축성 역사를 속히 진행하도록 전교하다

원문

○傳曰: "土木之役, 非所樂爲也。

大內有故, 而慶運宮, 亦有妖變, 不得移御, 則仁慶宮之役,

何可已也? 此宮, 工役浩大, 畢役不易, 故慶德小闕,

不得已先造。 而都監提調、都廳, 不如廟闕、

昌慶營建之時, 例必日晩仕進, 不爲終日監董,

旋卽還家, 非但提調, 都廳亦然, 役事之玩愒, 無足怪也。

提調員數, 多至十餘員, 而日次提調,

稱病不進之時, 居多, 宜乎解弛日甚矣。

且木石之輸入, 極緩, 軍丁之募立, 極少。

如是度日, 浪費料布, 而一自徵兵咨文出來之後,

爭請停役。

若奴賊作挐, 則他尙何計? 倘或一分稍安,

則已伐之木, 已收之米布, 將何以爲之乎? 此非爲好大尙侈。

而命造宮室, 事勢出於悶不得已,

宜勿爲外言所惑, 更加檢督從速畢役。"

광해군일기[정초본]126권,

광해 10년 4월 8일 정유 6/21 기사 /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궁궐 공사로 소요스러운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로 전교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128권,

광해 10년 5월 16일 계묘 2/2 기사 /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형조 판서 조정이 상차하여

양궁의 공사를 정지할 것과 체차를 청하다

형조 판서 조정(趙挺)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양궁(兩宮)의 공사를 정지하여 인심을 수습하소서.

군졸을 가려 훈련시켜서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리고 신의 본직(本職) 및 겸대한

영건 도감 당상의 직책을 체차하여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다만 경이 내간(內間)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니

간략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이 즉위한 뒤

경운궁(慶運宮)에 임어(臨御)해도

충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오래도록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경운궁에 변고가 생겨

억지로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피해 갈 곳 역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창경궁(昌慶宮)을 수선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창경궁 공사가 막 끝나자마자

요귀(妖鬼)의 재앙이 이 궁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창덕궁에까지 옮겨지고 말았다.

사세상 요귀가 작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착수했던 것인데

그것도 다만 공사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궐(小闕)만 우선 짓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근래 동궁(東宮)에

또 요괴스러운 변고가 일어났는데

옮길 만한 곳이 없어

그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신자(臣子)의 의리상 어떻게 감히

이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한단 말인가.

더구나 나무와 돌도 이미 준비되어 있고

공사도 반 이상 진척되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뒷날 다시 짓는다면

그 폐단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지금 우선 편한 대로 공사를 마친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군기(軍機)에 대한 일의 경우도 그렇다.

경 또한 비국 당상 가운데 한 사람인데

어찌하여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강구하지 않는 것인가.

오직 헛된 말만 개진한다면 실효가 없을 듯하다.

다시 더 마음을 쏟아 계책을 마련함으로써

국가를 안정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경이 누차 쇠약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있는데

매번 억지로 바쁜 업무를 수행하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허문(虛文)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영건 도감의 제조만은 체차해 주겠으니,

본직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원문

○刑曹判書趙挺上箚, (大槪,)

"請停兩宮之役, 收拾人心。

選鍊軍卒, 以備緩急。 且遞臣本職及兼帶營建堂上, 以安愚分。

" 答曰: "省箚, 具悉。 但卿似不解內間事情, 不得不略及。

寡昧忝位, 慶運足以臨御, 故無意移御昌德久矣。

不幸慶運有故, 强移于昌德, 而避御之處, 亦不可不預備,

玆命修繕昌慶。 豈意昌慶之設, 纔畢, 鬼妖之災,

先起于此宮, 轉移于昌德宮? 事勢不可仍處於鬼妖作挐之地,

先始仁慶宮之役, 只緣工役浩大, 小闕着令先造。

近來東宮, 又有妖變, 無處可移, 仍在水火之中。

其於臣子之義, 何敢請停此役乎? 況木石已備,

工役過半? 後日更造, 則厥弊尤多, 今姑隨便畢役,

何妨乎? 至如軍機, 則卿亦備局堂上之一也,

何不講究軍國大事乎? 唯陳空言恐無實效。

更加盡心規劃, 以安國家。

且卿累以衰病, 控辭, 每使强察劇務, 亦涉虛文。

只遞營建都監提調, 本職宜勿辭。

" 【王每以妖變, 下旨以塞停役之論, 使臣子不敢言。

其時三闕侍衛將卒皆言: "若有妖變,

吾輩亦寢其間, 豈不一番夢魔乎? 且慶德宮別堂樓閣,

窮極奢麗, 而以比之仁慶則爲少, 故文飾拒諫如此。】

선조를 비난하는 자들 중에

왜 일본 침략을 방비 안 했냐 비난하는 데

광해군에 비하면 선조는 뭐…

국경에서 난리가 나고 군방을 강화 해야 하는 시점에

궁궐 공사에 집중 하는 것이

광해군의 실리 중립 외교립니다.

일본 식민 사관 지키려는 일본군 간첩들아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876~1940)는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하며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일본의 관변·식민사학자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으로 근무하며

식민사학의 핵심 논리인

'만선사관(滿鮮史觀)'과

'타율성론'을 정립하고 확산시킴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876~1940)는

1908~1914년 만철조사실에서 만주사 연구

1915~1922년 일본군 육군참모본부

육군대학에서 동양사 강의

1922~1937년 조선사 편수회 간사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정당성을 역사로 편수함)

저술사

<< 광해군 시대의 만선관계>>

핵심 내용

"명의 원병 요청을 거부하고

후금과 화친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외교는

현실적이고 백성들에게 은혜로운 정책이다"

..............................................................................................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의 목적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당성을 위해

연구하고 허위 조작 노력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과거 광해군 때

조선인들이 무시한 청나라에 패 했다

그러니 광해군을 본 받아서

중립 실리 외교로 일본을 받들어야 한다.

광해군을 몰아 낸 역사적 잘못을 기억하고

일본 제국과 협력해야 된다"

이렇게 식민사관을 세뇌시키고 지금도

세뇌되어 짖어 대는 강아지들이 많다.

“영화 드라마로 식민사관 배운자들이여 정신이나 차려라”

Comments

Category
반응형 구글광고 등
State
  • 현재 접속자 180 명
  • 오늘 방문자 1,301 명
  • 어제 방문자 2,022 명
  • 최대 방문자 13,504 명
  • 전체 방문자 851,608 명
  • 전체 게시물 0 개
  • 전체 댓글수 0 개
  • 전체 회원수 1,529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