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몰랐던 '국민 아버지' 최불암... "국민 앞의 가시덤불 치우는게 광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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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몰랐던 '국민 아버지' 최불암... "국민 앞의 가시덤불 치우는게 광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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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몰랐던 '국민 아버지' 최불암... "국민 앞의 가시덤불 치우는게 광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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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6.10.30. 11:39업데이트 2026.10.3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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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우 최불암을 조명한 MBC '파하, 최불암입니다'의 한 장면.

1948년 인천 동방극장. 불이 꺼진 객석 맨 앞줄에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제 얼굴만 한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스크린에는 아버지가 기획하고 제작한 반공 영화 ‘수우(愁雨)’가 돌아가고 있었고, 어둠 속 여기저기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그 영화의 개봉을 며칠 앞두고 서울 회현동의 한 호텔에서 갑자기 숨을 거뒀다. 서른다섯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최영한(崔英漢). 훗날 ‘최불암’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모든 안방의 아버지가 된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사실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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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별세

‘수사반장’의 박영한 반장이자 ‘전원일기’의 김 회장, 그리고 14년간 ‘한국인의 밥상’을 지킨 ‘국민 아버지’ 최불암. 29일 87세로 국민의 곁을 떠난 그가 그리고자 했던 아버지상을 평생을 바쳐 우리에게 제시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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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최철 부고기사 /대중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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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와 건설영화사를 세웠던 아버지 최철 /MBC

◇ 두 번 불러본 아버지

그의 아버지 최철(崔鐵)은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상하이로 떠났다.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동생을 찾아간 길이었다. 해방 뒤 인천으로 돌아온 그는 꽤 큰돈을 쥐고 있었고, 그 돈으로 당장 이윤이 날 리 없는 두 가지를 차렸다. 신문사(인천일보)와 영화사(건설영화사)였다. 하와이 이민 사업자 데쉴러의 사택이었다는 송학동의 넓은 일본식 저택에 살림과 회사를 함께 두고, 남녀 배우 연구생을 공개 모집했다. ‘무영의 악마’ ‘조국을 위하여’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 ‘수우’였다.

어린 아들은 서울 외가에 보내졌다. 가끔 인천에 가면 윤전기 소리로 시끄러운 아버지 사무실에 신카나리아, 복혜숙 같은 당대 스타들이 드나들었다고 최불암은 생전 회고했다. 아버지와 나눈 대화라곤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가 전부였다고도 했다. 미제 과자를 사다 주던 손, 초등학교 입학식 날 아들을 못 찾아 우왕좌왕하던 뒷모습. 그에게 남은 아버지는 그 정도였다. 그는 2011년 한국일보 연재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날 낳아주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본 게 두 번 정도 되려나.”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관념’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가 당시 연재에서 밝힌 ‘아버지’는 이랬다. 도덕과 문화의 구현자여야 하고, 남의 아픔을 만져줄 줄 알아야 하며, 세속의 욕망을 정화시키는 존재여야 한다. 너무 관념적이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적으로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버지를 모르는 배우가 아버지를 연기했고, 시청자들은 그 얼굴에서 한국 아버지의 전형을 읽었다. 그는 그 사실이 두려웠다고 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르는 한국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시청자들은 TV를 보면서 내 얼굴에서 떠올리고 있었던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

그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내 연기에 묻어 나온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까웠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거기서 전형을 읽어낸다면, 그것은 모두의 바람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라고.

‘전원일기’ 김 회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파하~’ 웃음도 그렇게 태어났다. 말을 하고 싶어도 참고, 슬픔도 아픔도 답답함도 분노도 너털웃음에 날려버리는 것. 깊은 뜻을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는 것이 그가 ‘파하~’ 웃음 속에 담았던 ‘아버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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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조선일보 100주년 타임캡슐 봉인식에 참석한 사회 각계 인사들이 50년 후에 개봉될 자신의 수장품을 넣으면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①'미스터트롯' 임영웅 ②류호정 정의당 의원 ③백건우 피아니스트 ④원희룡 제주도지사 ⑤백상현 사진가(독자대표) ⑥김미형 국어문화원연합회 회장 ⑦'미스터트롯' 정동원 ⑧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⑨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 ⑩배현진 국민의힘 의원 ⑪김진욱 강릉고 투수 ⑫최불암 배우 ⑬손경식 경총 회장 ⑭나윤선 재즈 가수. /오종찬 기자 2020.11.06

◇아버지를 채워준 강인한 어머니

아버지가 떠난 뒤 소년을 키운 것은 어머니 이명숙과, 그가 차린 두 가게였다. 먼저는 동방극장 지하의 음악다방 ‘등대’. 인천 문인과 예술가들의 아지트였고, 덕분에 아들은 극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를 봤다. 1950년대 중반 어머니는 외아들과 친정 부모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명동 유네스코회관 건너편에 막걸리집 ‘은성(銀星)’을 열었다.

그보다 앞선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중국에 있던 시절, 어머니는 인쇄소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혼자 아들을 키웠다. 인천의 사글세 단칸방. 맡길 데가 없어 밥상과 요강과 만화책을 넣어두고 문을 잠그고 나갔다. 다섯 살 아이는 창호지에 구멍을 내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했고, 등화 관제로 캄캄해진 밤이면 머릿속으로 아빠, 엄마, 아들 역할을 혼자 번갈아 맡는 ‘드라마’를 그렸다. 그는 훗날 시상식 단상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그 문고리가 떠오른다고 했다.

은성은 가난한 예인들의 살롱이었다. ‘명동 백작’ 소설가 이봉구, 수주 변영로, 박인환, 김수영, 천상병, 전혜린, 화가 김환기와 손응성이 드나들었다. 막걸리 찌꺼기를 버렸다고 어린 최불암의 따귀를 갈긴 이가 변영로였고, 손가락에 꽁초를 끼고 벽에 기대 “아, 서산에 해는 진다”를 읊으면 손님들이 막걸리 한 잔을 권하던 이가 천상병이었다. 천상병은 한 번도 앉는 법 없이 서서 한 잔을 비우고는 손님과 주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잠시 뒤 박봉우가 들어와 똑같이 했다. 술 동냥을 하면서도 절도와 친구를 버리지 않는 모습. 최불암에게 그것은 예술가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으로 보였다.

198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유품을 정리하던 그는 라면 상자 가득한 외상장부를 발견했다. 펴보니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안경’ ‘코주부’ ‘꺽다리’ ‘키다리’…. 별명뿐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비밀을 지켜주려던 어머니의 방식이었다. 남의 궁핍을 까발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름을 주고도 그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중학교 들어가던 날 큰아버지가 ‘불암(佛岩)’이라는 이름을 가져왔다. ‘부처님 바위’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었다. 불자였던 어머니는 그 거룩한 이름을 아들에게 쓰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여겨, 생전 단 한 번도 “불암아” 하고 불러보지 못했다고 최불암은 생전 말한 바 있다. 2009년 그의 이름과 한자까지 같은 불암산의 명예 산주로 위촉된 뒤 세워진 시비에는 그래서 이렇게 적혔다.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 번 불러보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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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부터 나이든 역할을 해온 최불암/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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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부터 나이든 역할을 해온 최불암/MBC

◇모두가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없던 자리를 채운 것은 은성의 손님들이었다. 서라벌예대 연극과 시절, 그는 ‘어머니가 술집 하는 것이 얕보일까’ 싶던 사춘기를 지나 은성을 선망의 공간으로 다시 보게 된다. 손님들은 그의 연극을 보고 와서 틀린 데를 짚었다. 서른 살에 ‘수사반장’으로 톱스타가 된 뒤에도 잔소리는 계속됐다. “네가 수사반장이긴 해도 직접 수갑 채우는 건 하지 말아라.” “사건 해결되고 흰 손수건으로 땀 닦는 장면은 아주 좋더라.”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에게 그 잔소리는 달았다.

가장 매서운 모니터 요원은 어머니였다. 1971년 서른한 살에 쉰다섯 살 형사 역을 맡은 그는 초반에 와이셔츠 위에 권총을 차고 뒤에 수갑을 달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왔다. 최불암은 생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느 날 어머니가 묻습니다. ‘누구를 쏘려고 총을 차고 다니며, 그 수갑은 은팔찌냐?’고요.” 배우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눈을 가리고 나오지 말라고도 했다. 그는 그때 과장을 덜어내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 뒤 박 반장은 트렌치코트 한 벌과 담배 몇 개비로 남았다.

어머니의 아버지, 궁중 악사였던 외할아버지의 그림자도 있었다. 어머니가 종로로 일하러 나갈 즈음 그는 외할아버지와 신길동 작은방에서 몇 년을 함께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궁내 악사 시절의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의 외로움, 늙어가는 몸의 연민 어린 동작과 표정은 소년의 몸에 묻었다. 스물예닐곱부터 노역을 맡아 서른넷에 ‘파계’에선 입적 직전의 노승을, 서른여덟에 드라마 ‘아리랑 아’에선 다섯 살 많은 이순재의 아버지를 연기했다.

그는 이것을 ‘월반’이라고 불렀다. 그는 노트를 들고 서울역에 사흘을 죽치고 앉아 노인들 얼굴을 그리고, 교장 선생님 열 명을 만났다. 나이를 건너 그 깊이를 모르고 연기했다는 생각이 들어 ‘엉터리 배우’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국민 아버지’라고 감탄하고 있는 동안 정작 그의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던 것을 알아챈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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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김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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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김민자

◇”국민 앞 가시덤불 치우는 게 광대 정신”

주로 아버지 역할을 하느라 ‘멜로’ 역할을 해보지 못했던 그의 평생 꿈은 ‘사랑하는 것’이었다. 연기로는 어려웠지만 인생에서 그는 평생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의 곁을 지킨 아내이자 배우 김민자였다. 바른생활 사나이인 그에게도 무려 ‘스캔들’이라는 게 있었다. 그는 “알고 보면 내가 낸 것”이라고 했다.

1960년대 말, 그는 국립극단에 있었고 김민자는 KBS ‘정동마님’에 출연하는 톱 탤런트였다. TV에서 본 그 사람은 마르고 눈이 크고 키가 컸다. 이상형이었다. KBS 특채로 들어간 그는 방송국 매점에서 기다렸다가 신문에 구멍을 뚫고 훔쳐봤고, 몰래 찻값을 계산했다. 그리고 주변에 ‘내가 김민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열심히 냈다고 했다. 그 소문은 주간한국 기자 귀에 들어 대서특필됐다고 했다.

방송에서 오랜 기간 부부로 등장했던 배우 김혜자와 진짜 부부 사이인 줄 아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았다. 공항에서 만난 노부부가 아내 김민자를 향해 “따님이신가 봐요?”라고 말한 일화를 꺼낸 적도 있다. 여전히 설렌다고 했던 그의 곁에는 항상 아내가 있었다.

가톨릭 신자인 아내를 따라 2018년 그도 세례를 받았다. ‘아시시의 성인’으로 유명한 프란치스코로 세례명을 골랐다. 남편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회장을 맡아 소외된 어린이 돕기에 나설 때 아내 역시 청각장애 아동을 돕는 ‘사랑의 달팽이’ 회장을 18년 맡았다.

“진정한 봉사는 비 맞고 있을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던 그는, 배우를 ‘광대’라 불렀다. “국민이 가야 할 길에 가시덤불이 있으면 치우는 것이 광대 정신”이라고.

2014년 SBS ‘기분 좋은 날’을 끝으로 그는 드라마에서 물러났다. 은퇴가 아니라 ‘물러남’이라고 했다. 스태프에게 지적도 받고 해야 발전이 있는데 다들 나이 많다고 어려워해서 더는 늘지 않겠다 싶었다는 것이다.

박영한 반장은 ‘수사반장’ 마지막 회에서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길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경찰서를 나섰다. 그 대사를 그는 노년까지 되뇌었다. 눈부시게 성장한 사회의 그늘을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던 그였다.

평생 아버지를 제대로 불러보지 못했지만 온 국민에게 ‘아버지’로 불리며 사랑받은 배우, 그는 어린 시절 외로움에 혼자 울었지만, 올곧은 어머니 덕에 ‘예술인 르네상스’를 꿈꿨던 타고난 예인. 그는 이제 아버지, 어머니를 마음껏 불러볼 것이다. ‘불암아~’ 하고 손짓하는 어머니를 향해 달려가면서 말이다. ‘파하~’ 하던 웃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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